나를 뚫고 간 시간들
문득 나를 휩쓸고 간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통제할 수 없이 버거운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는데 그것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치여다니기만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당황하고 슬프고 불안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몇몇 기억이 스스로 지워져 갔다. 나는 항상 주변을 의식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치게 되는 것도 몹시 싫었다.
항상 뭔가 빠트린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법을 까먹은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마땅히 느꼈어야 했을 감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보듬을 수 없이 바람이 휘휘 빠진 풍선처럼 비어 가는 채로 날아다녔다.
대구에 살다가 22년 3월에 오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오랜 장거리 연애를 끝마치고 결혼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살게 되었던 대구에서 졸업하고서도 줄곧 살았는데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나는 대구 이곳저곳의 월세방을 떠돌며 지냈는데 오산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은 대구에서도 정말 살기 싫었던 동네, 살기 싫은 집의 조합이었지만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마지막에는 떠나기 싫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떠나야 했기에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그렇게 나는 경기도민이 되었다.
대구를 떠나올 때 많이 그리울 거라고 생각했던 곳 중 하나는 동성로였다. 동성로에서의 추억이 정말 많았다. 동성로의 골목길 구석구석을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참 많이 걸어 다녔다. 가벼운 바람에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던 나의 20대가 대구에, 동성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구역에서 동성로 쪽으로 이어지는 큰 거리에 귀금속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상상하면 동성아트홀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영화를 참 많이 보았는데... 귀금속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와 큰길을 건너면 있던 서브웨이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서브웨이의 바로 건너에는 가장 좋아하는 옷 가게 ‘노모뉴’가 있었다. 젊은 사장님의 센스가 돋보이는 구제 의류점이었다. 그 외에도 눈감으면 그곳이 보이고 그곳의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그 길이 생각난다.
대구의 촌스러운 멋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경기도는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경기도의 사람들은 바빴고 빨랐다. 지방 사람들 특유의 여유나 느림을 찾아볼 수 없없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식이 내게는 가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시가 주는 느낌도 완전히 달랐다. 지방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도시 안에 있는 느낌이었지만 경기도는 도시 간의 긴밀한 교류가 서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도시 안에 있다는 느낌보다 권역에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마치 유럽연합처럼 말이다.
오산에 살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대구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다가 수원으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2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는 수원집의 월세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사 오던 날에 얼음보다도 차가웠던 마룻바닥을 밟았던 기억이 여전히 난다. 하반신을 모두 얼려버릴 듯한 기세로 차가웠던 그 느낌은 내가 경기도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계속 느꼈던 소외감, 외로움과 닮아 있었다.
수원으로 이사 오고는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예식 날짜를 잡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집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림살이를 꾸렸다. 또 집 근처에 새로 구한 직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완벽하게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타협했다.
결혼준비와 새로운 직장에 대한 적응 과정은 나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버거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 날벼락같은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말기 암에 전이까지 되었다. 슬프고 겁이 났는데 그보다도 앞서 가장 먼저 나를 덮쳤던 감정은 왜 분노였을까?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상황이 미워 화가 났고 나중에는 병이 그렇게까지 커질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은 엄마가 미웠다. 왜 이렇게 인생은 항상 이런 식으로 어려운 건지 그것은 절묘한 순간에 절묘한 방식으로 나를 괴롭힌다. 누군가를, 환경을 탓하는 마음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엄마는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치료 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우리 가족은 항상 그랬듯 상황을 좋게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장기 전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엄마는 선항암 후 수술에 들어가기로 했고 총 8번에 걸친 항암 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수술 날짜는 내 결혼식 이후로 잡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8회의 항암 주사 중 가장 힘들고 아프다는 8번째 항암 주사를 맞고 내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다. 피부는 검었고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더운 날 무거운 가발을 써야 했기에 가발이 벗겨질까 걱정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현미경을 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솟구쳐 오르던 눈물 때문에 현미경이 종종 뿌옇게 변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엄마가 아프다는 것도 받아들이고 결혼준비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어 주어진 일을 해나갔다. 그래도 모든 것이 착실히 진행되어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슬프던 봄날에 나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결혼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었다.
그러다 또 한 번 나를 무너트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결혼식 2주 전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내 결혼식에 와주시길 바랐지만 할머니는 먼 길을 떠나느라 그럴 수 없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배웅해 드렸지만 충분히 마음에 차지 않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슬퍼할 수 없음에 슬펐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문득 폭풍처럼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삶이란 원래 이렇게 버겁고 힘든 것이었는데 내가 잊어버렸구나.', '한 순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데 내가 또 잊어버렸구나.'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고요히 뜬 채로 끝이 보이지 않는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다.
당시의 나는 너무 불안정해서 터져버리기 직전의 물풍선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또 고요해졌다는 게 참 신기하다. '시간이란 건 정말 묘약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겪었던 시간과 상황과 심지어 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요히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