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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나다 Mar 23. 2023

'요샌 딸이 좋아'란 말의 속뜻

딸의 도리를 당연시하지 마세요.


 저는 딸 둘맘인데요. 딸 둘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어른들이 다들 한 마디씩 거드십니다.




  '요새는 딸들이 좋아.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어.'라고요. 처음엔 딸을 좋아해 주는 것 같아 마냥 감사하고 기분 좋았는데요, 요즘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딸을 선호하는 요즘의 작태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선호하는 이유가 불순해서요.




 대부분의 경우 딸을 잘 키워서 효도나 챙김을 바라는 속셈이 큰 것 같아요. 애교 많고 부모 비위 잘 맞춰주고 고분고분하고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면서도 친구같이 조잘조잘 수다 떨며 부모와 잘 대화하는 그런 딸을 바라는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또 '요샌 딸이 좋다. 아들은 키워도 소용없다'라고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그 옆에서 다른 아주머니는 애매하게 웃으시며 '글쎄요, 전 아들만 둘 키워서요..'라고 말끝을 흐리시길래, 그분께 '저는 딸만 둘이라, 아들 있으신 분들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아들은 듬직하잖아요!'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엄청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내더군요. 왜 아들 키우는 엄마는 죄인도 아닌데 주눅 들어 다녀야 하나요?




 도대체 아들, 딸이 다 뭔가? 왜 이렇게 편 가르기를 해야 하나! 남아선호사상이 심할 때는 딸들을 엄청 차별하며 여아태아낙태도 서슴지 않더니, 도대체가 이놈의 나라는 좋아하는 선호의 감정조차 '적당히'가 없다, '적당히'가! 왜 무언가를 좋아하는 선호의 감정조차, 그것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외와 차별의 감정을 겪어야 하는 걸까.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도 정말 듣기 싫어요.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의 속뜻이 뭔가요?




 어려웠던 시절, 온갖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 도맡고, 동생들 키우고, 좀 크면 생활비 벌고... 들어가는 건 없고 부려먹기만 하는 집안의 공식'호구' 아니었나요? 교육은 다 남자 형제들 시키고 딸들, 특히나 맏딸은 본인을 갈아 넣어 희생하길 강요당하는 위치에 있었죠. 동생들, 가족들 위해 헌신과 희생만 했던 그 시절의 횡포(?)가 남아있는 옛말 아닌가요?




 물론 지금은 이 말이 많이 사라졌고 흔하게 쓰지도 않지만 아직까지도 딸 둘이 있다고 하면, 저런 얘길 심심찮게 듣습니다. 요즘엔 저 정도 속뜻까진 아니더라도, '무릇 맏딸이라면 엄마를 도와 집안의 자질구레한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강요 같아서 마냥 웃으며 넘기기 힘듭니다.




 집안의 가족들을 씻기고, 먹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온갖 잡스런 가사노동이 무보수인 것도 억울한데, 집에서 논다란 소리까지 들으니 더 허탈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귀결되는 냉혹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무보수로 온갖 잡스런 일들을 떠맡으며 그 노고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맏딸에게까지 그 잡스러움을 연계하라고요? 제가 너무 지나친 발상을 하고 있나요? 저는 맏딸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전체가 각자 조금씩 분담하여 가사를 함께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역할을 특정하게 맏딸에게만 국한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가 아토피라 어릴 적에 대학병원에 자주 데리고 진료받으러 다녔는데, 그때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절 보고선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샌 딸이 좋아!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어. 딸 키우면 엄마 맘도 알아주고 잘 챙겨주니 얼마나 좋아! 비행기 태워주는 건 아들이 아니라 딸이야!'




 딸은 엄마에게 명품백을 사주고, 해외여행 보내주니 아들보다 딸 키우는 게 낫다, 란 말이 좀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중 딸을 교육시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신 분들이 몇 분이나 될까요. 흔히 지원은 아들들에게 몰빵 하고, 딸들은 투자하는 거 없이 나중에 돌려받으려고만 하는 심보가 고약하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물론 이 얘기를 어르신께 직접 한 건 아니고요, 생각만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할머니를 대학병원에 모시고 온 분들은 아들들이었습니다. 큰 아들로 보이는 나이 지긋하신 중년의 남자분이 민망해하며 '저희 어머니가 정신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과하고선 할머니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셨어요.




딸 둘 키우는 입장에서 속사포 소신발언 좀 하겠습니다.




 딸은 챙김 받는 존재지, 부모를 챙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친구 같은 딸은 없으며, 딸은 딸일 뿐,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허심탄회한 고민과 속얘기는 나이대 비슷한 친구에게 할 일이지, (혼자 풀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괜히 딸 붙잡고 한풀이하지 맙시다. 딸들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딸들이 감정 쓰레기통이 될 위험이 큰 것도, 엄마가 아들보다 딸에게 상대적으로 감정적 의존을 더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딸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고 공감해 주길 바라고, 그걸 당연시합니다. 하지만 딸도 어린아이 일 뿐이며 부모의 마음을 언제나 알아줄 의무는 없습니다.




 본인 앞길 찾아 살아가기도 벅찬 딸들에게 부모의 삐뚤어진 기대심리로 인해 과중한 부담감을 주지 맙시다. 그저 딸이든 아들이든, 자식들은 언젠가 내 품을 떠날 타인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의무이고요. 자식들을 키우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식들을 내 뜻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도 아니고, 효도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최종목표는 '잘 독립시키기'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자식들이 독립해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고요.




딸들이 좋아하는 일하며 자기 살길 찾아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딸들의 챙김을 받기 위해 키우는 대신, 낳았으니 책임을 다한단 마음으로 키웁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게 많아.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하신다면, 불편한 진실을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개 '좋은 게 좋은 거지'의 영역 안에 속하지 않더라고요, 저는. 저에게는 좋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딸 둘을 데리고 다니다 어른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요새는 딸이 좋아.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어.'라고 하는 말을 또 듣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딸 키워도 소용없어요. 제가 그런 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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