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즐겨 읽는 중입니다.
나는 요즘 소설과 에세이를 즐겨 읽고 있다. 예전엔 소설 읽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냥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를 공들여 읽을 필요가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시간들을 잘게 쪼개어 유용한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거나, 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뭔가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읽고 싶었다. 조급하게 하나라도 더 체득하기 위해 혈안이 됐던 것 같다.
독서에서조차 실용성을 추구했던 나의 성향은 자연스레 성과를 내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수순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무작위로 정보와 지식들을 흡수하기 위해 글들을 읽었지만, 읽을수록 어째서인지 나의 마음 밑바닥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실용서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도서관에서 책들을 훑어보던 어느 오후, 나는 몇 년 동안 관심도 주지 않았던 문학 코너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엘레나 페란테의 장편소설을 골랐다. 그리고 예전에 즐겨 읽었던 일본의 여성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 신간도 빌렸다.
집에 돌아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읽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듯 읽는 독서가 아니라 늘어진 고양이처럼 여유롭고 느긋하게 읽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완벽한 것처럼 보였던 일상이 사실은 거짓과 기만으로 세워진 허상이었다. 작은 계기로 시작된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자 입장에서 간접 체험하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완벽한 척 잘난 체해도 어이없는 실수로 허우적대고 형편없는 선택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인간은 역시 완벽하지 않은 결함이 많은 존재구나, 란 생각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런 결함 많은 존재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고, 그들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혐오 대신 사랑으로 감싸게 된다. 결함 많은 타인을 감싸다 보면 결함 많은 나 자신 또한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
다그치고 비난하는 대신 '어차피 인간 자체가 결함 덩어리라 일개 개인인 나 또한 실망스러운 언행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순리다.'라고 자기합리화해 버리는 거다.
이게 소설을 읽는 이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