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찾아 떠나온 지 1년
이주 전, 파리에서 남쪽으로 한시간 반 떨어진 곳에 사시는 쟈키의 어머니가 쟈키의 집에 오셨다. 내가 쟈키 부모님 댁에 갈 때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내 프랑스어가 부족하기도 하고 남자친구의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해서 그 동안 은근히 피하고 있었는데, 쟈키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바람에 도망칠 곳 없는 작은 아파트에 한 시간 남짓을 쟈키의 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한껏 당황한 내 마음을 아셨는지 쟈키의 어머니는 먼저 ‘차나 한 잔 마실까’ 하며 자연스레 말을 걸어주셨다.
다음 날 캐나다에 있는 친정 식구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던 어머니는 자연스레 어떻게 본인이 프랑스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곳에서 삶이 어땠는지 이야기해주셨다.
라오스 몽족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도왔고 북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라오스 내에서 살기 어려울 정도로 탄압을 받게 됐다. 이후 라오스 몽족의 많은 수가 라오스를 떠났고, 쟈키 어머니의 가족 역시 라오스를 떠나 태국에 머물면서 캐나다로 이민을 시도했다. 여러 번 서류에서 거절을 당하자 부모님은 혼처를 마련해 쟈키의 어머니를 먼저 프랑스에 보내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머니가 프랑스에 온 지 두 달만에 다른 가족들은 캐나다 서류가 통과되어 모두 캐나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쟈키네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린 나이에 아무도 없는 타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집 정원에서 6명의 자녀들과 4명의 손주들이 모여 바베큐를 하는 요즘을 보내고 계시지만, 이 곳에 적응해 삶을 꾸리는 그 수 십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을까.
그러고보면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나의 막내 이모도 내가 외국인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래도 한국 사람 만나서 한국에서 살아. 외국에서 사는 거 참 외로워.’ 라고 말했었다. 이모 부부는 워낙 사이도 좋고, 이모도 일도 하시면서 즐겁게 사시는 것 같았기에 이모가 일상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어떤 걸지 그 때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1년을 지낸 지금은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 알 것 같다. 사랑에 언어는 큰 장벽이 아니지만,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는 언어는 꽤나 큰 벽이다. 한국어로 말할 때보다 나는 훨씬 느리고 덜 총명하며 조금 더 재미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뒷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달려왔던 1년 전과 달리 요즘은 학교를 졸업하면 어디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남자친구도 있고 교환학생도 했던 터라 프랑스에 처음 적응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이 비교적 적었지만, 그만큼 이 곳 생활에 대한 애착이나 파리의 매력도 나에겐 그다지 크지 않았다. 프랑스는 보행자에게 친절했지만 운전자 대 운전자로서는 겁이 날 만큼 무례했고, 바게트는 맛있지만 카페 라떼는 맛이 없었다. 프랑스나 한국 중 한 곳이 나에게 뚜렷이 더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프랑스와 한국은 결국 남자친구가 있는 곳,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곳의 차이가 가장 컸다. 물론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엄마, 아빠, 언니 둘, 7살 조카와 기쁨이를 모두 대체하기에는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쟈키와 싸움이라도 한 날에는 이런 이야기를 바로 털어놓을 존재가 없다는 것에 그간 잊고 있었던 외로움이 배가 되었다.
쟈키가 없었더라면 아마 프랑스의 생활은 경험의 일부분으로 정리가 되었을 거다. MBA를 졸업한 뒤 이 곳에서 직장을 구해 경험 삼아 2-3년 일을 해보고 귀국하거나, 그마저도 직장이 잘 구해지지 않아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더라도 큰 아쉬움은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학교가 끝난 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는 건 한국에서 나와 쟈키 두 사람 행복의 합이 이곳에서보다 더 클 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외국인으로서 삶이 힘든 것 같이 한국에서 쟈키의 삶도 녹록치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쟈키가 한국에서 1년여를 사는 동안 라오스 혈통, 즉 동남아시아인 외모의 외국인으로서 받았던 차별도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이에 더해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문제까지 생각해보면 쟈키에게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게. 한국으로 가자.’고 강하게 주장할만한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아깝게 원하던 걸 놓친 일도, 뜻하던 바와 달리 팔자가 꼬인 일도 많았지만 본래 모든 일이 다 결국엔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는 생각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렇게 멀리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게 참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쟈키와 나 둘 중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들과 자기의 언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한 번뿐인 인생에서 얼마나 커다란 상실인지 점점 실감이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