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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디 Oct 03. 2023

나의 이웃 사람 무슈 자자

좋은 이웃이 되는 걸 포기했다

작년 가을, 이전 세입자였던 할머니가 집을 나가고 몇 달을 비워져 있던 옆 집에 새 주인이 이사를 왔다. 아저씨는 이혼을 하고 전부인과 살던 집을 나와, 남은 돈으로 우리의 옆 집을 샀다. 할머니가 홀로 적어도 10년 아마도 2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살았던 탓에 집은 도배와 설비 등등을 모두 싹 고쳐야 하는 상태였고, 그 덕에 근처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았던 집이었다.


무슈 자자 아저씨는 밝고 호탕했고 안 좋게 말하면 부담스러웠다. 말이 안 통하는 나는 아저씨와 인사를 하는 게 다였지만, 쟈키는 아저씨랑 종종 오랫동안 대화를 했다. 새로운 동네에 이사와 아는 사람도 많이 없어서 그런지, 무슈 자자는 쟈키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어떻게 귀신같이 구분하는 지 모르겠다!) 자기 집 문을 열고는, 쟈키에게 아파트 공동 관리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가 오늘은 집안 인테리어를 어떻게 바꿨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둘이 함께 아저씨를 만날 때면 아저씨는 대화 끝에 항상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했는데, 쟈키는 그때마다 웃으며 다음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완곡한 거절인 셈이었다. 그럼 나는 아저씨와 헤어진 뒤 ‘왜 다음에 같이 밥 한번 먹지!’ 라고 말하곤 했는데, 쟈키는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슈 자자와 가끔 술 한 잔 기울일 만큼 가까운 사이는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저씨의 외로운 처지가 이해가 되어 한 번은 식사를 같이 하고 싶었지만 내가 아저씨와 둘이 밥 먹을 건 아니었으므로, 아저씨와 우리는 가끔 먹을 것을 나누며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이웃 사이로 지냈다.



그렇게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이웃으로 지낸 지 반년 정도 지났을까? 그 날도 쟈키와 함께 아파트 건물 앞에서 무슈 자자 아저씨를 만났다. 평소처럼 일을 구하는 일, 오토바이를 팔려는 것 등등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건물의 맨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그런데 그 집 아저씨는 이웃 일에 절대 도움을 주지 않고 아주머니는 약간 우울증이 있는 것 같다는 둥 흉보는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욕하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고 아파트 건물 바로 앞에서 같은 건물 사는 사람을 욕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럴거면 목소리나 작던가!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집 문을 열고 나오는 데 문 앞 카페트 위에 아저씨가 둔 게 확실한 그릇이 5-6벌 정도 놓여 있었다. 얼마 전 나누어드렸던 연어 고기에 대한 답례인 듯했다. 그릇은 나도 서랍장에 안 들어갈 만큼 많았던 터라, 아저씨의 집 앞에 다시 그릇을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그 날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 그릇들이 건물 쓰레기 장에 내놓아져 있고, 그 중 아마도 가장 멀쩡하다고 생각하신 듯한 그릇 하나가 다시 우리집 카페트 위에 올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릇을 아저씨 집 앞에 두면, 또 다른 접시가 우리집 앞에 놓여있는 이 이상한 그릇 움직이기는 거진 일주일동안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나는 무슈 자자 아저씨한테 완전히 질려버렸다. 마침내 아저씨와 우리집 사이의 짧은 복도 정중앙에 돌려드렸던 접시가 놓여있는 걸 보고는 “저 아저씨는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직 짜증이 최고조일 때, 나는 엄마에게 전화해 무슈 자자와 접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아저씨가 줄 건 없는데 보답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왜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냐고 했다. 아저씨가 오기가 생겨서 더 받을 떄까지 접시를 갖다 놓으신 것 같다고도 했다. 뭐라도 나누려는 아저씨의 마음, 그리고 그걸 거절당했을 때 아저씨가 느꼈을 민망함이나 불쾌감을 접시가 이동하던 동안에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집 앞에 다시 놓여있는 접시를 보면 나 역시 이 아저씨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기는 거다.



이 접시 사건이 생기기 불과 두 달 전에 영화 ‘오토라는 남자’를 보았다. 아내를 잃고 사람들에게 늘 공격적으로 대하던 오토 할아버지가 멕시코 출신의 명랑하고 다정한 새 이웃 ‘마리솔’과 그 가족을 만나면서 점점 마음의 위로를 받고,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따뜻한 내용이었다. 물론 마리솔과 정반대의 성격인 나는 마리솔처럼 살갑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리솔처럼 누군가가 외로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와 현실은 어찌나도 다른 것인지! 이혼을 하고 새로운 동네에 이사 온 무슈 자자와 외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는 오토 할아버지와 마리솔 만큼이나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이웃이 되어야 마땅한데. 현실은 아저씨에게 정을 베풀기는커녕 아저씨가 주는 걸 받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고 곤혹스러웠다.


우연인지 아니면 아저씨가 의도한 것인지, 접시 사건 이후로 우리는 한 번도 아저씨를 마주친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상황이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접시가 왔다갔다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아저씨네 문을 두드리고 ‘마음은 정말 감사한데 저희 집도 접시가 워낙 많아서 둘 곳이 없어서요.’ 라고 제대로 거절과 인사의 말을 하지 않은 게 마음 한 켠에 걸린다.


몰입해있던 상황이 끝나고 나니 그제서야 나는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었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 스스로가 나름 좋은 사람이라는 자부가 있었는데, 완전한 타인을 따뜻한 마음으로 신경쓴다는 건 영화로 볼 때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줄 만큼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상과 그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스스로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무슈 자자가 아닌, 다음에 생기는 이웃에게는 더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면 이 괴리가 당분간은 좁혀지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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