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 서글퍼도
혜림은 운동을 해도 유독 잘 빠지지 않는 뱃살을 측은하게 만져 보았다. 팔, 다리는 가느다란데 밥만 먹고 나면 유독 불룩해 보이는 배가 남들 눈에도 확연히 뛴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 어머, 선생님! 배가 왜 그래? 혹시 임신했어? 임신한 배 같아. "
혜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내 배를 보고 면전에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다니. 아무 일 아닌 듯이 에둘러 피하려 했으나 민망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 어머? 그래요? 점심밥 먹고 나서 그런가...? "
" 내가 종종 봤거든. 5교시 지나고 보면 배는 다시 쏙 꺼지더만. 여하튼 정말 신기하네. 밥 먹었다고 금세 그렇게 배가 나와? "
혜림은 자신의 배를 유심히 다시 보았다. 조롱박 바가지를 엎은 듯 정말 동그랬다. 사실 혜림은 상의 티를 꼭 바지나 치마 위에 내려 입곤 했다. 배의 굴곡이 식사 전후로 유독 차이가 있다는 걸 혜림 자신도 걸 알고 있었기에 이미지 관리상 그렇게 옷으로 잘 감추어 왔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잘록한 허리를 뽐내며 지나가는 여자들은 자신과는 다른 종족이라 여기며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 적도 많았다. 동료 선생이 농담 삼아 "밥 먹으면 임신 5개월"이란 별명을 붙여주자 혜림의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혜림은 일찍부터 음식을 빠르게 먹고 절대 남기지 않는 식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는 대학 1학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혜림은 학교식당의 밥 한 끼로 그날 하루를 버텨야 했다. 한 끼에 1400원뿐인 가격인데도 밥과 국, 반찬을 양껏 담을 수 있는 학생식당은 혜림의 맘에 쏙 들었다. 그러나 새내기 여학생의 야리야리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점심시간이면 그녀의 식판은 남들이 보기에도 조금은 과하다 싶은 만큼 밥과 반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미니 봉우리가 여러 개 솟은 듯했다. 혜림도 식판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고 나면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지만 빠듯한 용돈으로 학교생활을 감내해야 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혜림은 빠른 속도로 식사를 했다. 배가 고픈 것도 있었지만, 밥과 반찬의 양이 줄어드는 속도는 그녀의 부끄러운 마음을 감춰주는 속도와 맞물려 있었으니까.
간간히 동아리 방에 들리면 선배와 친구들이 사 온 과자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그때도 혜림은 연신 과자를 입에 주워 담으며 배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는 습관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저녁까지도 버틸 수 있을 때가 많았다. 배의 탄력성이 좋아진 건 이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당연 점심이나 저녁을 사주는 선배나 동기의 친절을 거절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새 책으로 대학교재를 들고 다닌다는 건 혜림에겐 언감생심이었다. 교재를 복사해서 재본을 뜨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으나, 혜림은 개강일 첫 수업을 마치고 나면 도서관으로 곧장 달려가 교재를 재빨리 대출해서 이후 연장과 반납, 예약을 반복해서 공부해야 했다. 리포트는 학생회관 매점에서 A4 용지만 구입하면 공용 컴퓨터실의 프린터기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이를 대폭 활용했다. 어떻게든 적은 용돈으로 리포트까지 작성해서 제출하려면 이른 아침부터 공용 컴퓨터실을 방문하는 부지런함을 떨어야 했고, 과친구들에게 나누어줄 분량까지 모두 복사하려면 여러 번에 걸쳐 줄을 서며 눈치껏 프린트를 해야 했다. 용돈이 부족해 점심으로 300원짜리 크림빵을 구입해 빈강의실에서 홀로 배를 채울 때면 서글픈 마음이 훅 올라오기도 했다. 학생식당 밖 카페나 레스토랑 창문 너머로 우아하게 칼질을 하거나 차를 마시는 이들은 혜림에겐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여겨졌다. 그래도 학교 자동판매기의 100원짜리 커피가 혜림은 맛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옷을 잘 입고 다니거나 헤어에 잔뜩 힘을 들인 또래의 여자친구를 보면 혜림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돈이 없는 삶은 저절로 그걸 알게 해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결핍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 결핍을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 외적으로 가지지 못한 결핍은 오히려 내면의 풍부함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치 그 균형을 맞추려는 듯이. 혜림도 그랬다. 전공서적을 사지 못해 반납과 대출을 반복하며 공부하는 삶은 그때그때 읽는 책의 내용들을 완전히 소화해 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산출능력을 강화시켰고, 미리미리 과제를 준비하는 성실하고 계획적인 삶의 태도를 지속시켰다. 빠듯한 용돈은 과외나 알바와 같은 생존능력과 재정관리, 자기 경영과 같은 슬기로운 대학생활로 귀결되었다. 혜림은 박탈감으로 자신의 인생을 우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짜가 아니겠는가. 때론 돈이 없어 서글퍼도 이는 돈의 소중함과 돈이 가진 힘을 일찍부터 알게 하여 저축을 생활화하는 태도를 지니게 하였다. 비슷한 가정형편의 친구들도 많았기에 덜 외롭다 여겼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대학생활만으로도 혜림은 행복했다. 혜림은 늘 꿈을 꾸고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에 나오는 주디 애보트, 초록 지붕집의 빨강머리 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꿋꿋이 대학의 낭만을 누리며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그리고 대학 1학기를 마치며 당당히 장학금을 거머쥐었다. 혜림이 가진 외적 자원이 너무나 빈약했기에 이러한 결과는 혜림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자신감이 충만히 올라왔다. 혜림의 축척된 성실함과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은 계속해서 혜림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