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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Mar 12. 2023

징글징글한 전 남자친구

8년간의 질긴 인연이 건네는 위로  


- 오후 9:24분

카톡에 보이스톡 부재중 내역이 찍혀 있어서 들여다보니 전 남자친구 권이었다. 전화번호를 차단해 두어서 전화를 할 수 없으니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건 거다.  


"얘는 진짜 징글징글하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린 8년째 한결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너도 대단하다 몇 년째야"

"뭐가? 생각나는 거?"  

"응 뉴걸이 시원치 않니? 왜 자꾸 추억여행하는데?" 


나의 모진 말을 읽곤 잠시 동안 대답이 없던 권에게서 답장이 왔다.  

"난 아직 생각나는데 좋았어서"


권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나도 7개월 만에 온 그의 연락이 반가웠다.


8년 동안 우린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차단하면 권은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었고, 카톡마저 차단하면 권은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서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런 권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버렸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통화가 되면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근황을 이야기했고 각자 최근의 연애가 실패한 이유와 왜 다시 혼자가 된 건지 원인 분석을 했다.

그러고는 4년 동안 병맛이었던 우리의 러브 스토리를 회상하곤 했다.


밤새도록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기 일쑤였고 그러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 8년 전, 2015년 어느 날

우리는 목동의 한 이자카야에서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지인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무슨 게임에 걸렸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권과 나에게 모두들 뽀뽀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뽀뽀해! 뽀뽀해! 아 빨리해 그냥! 뭐 죽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그치자 권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아 진짜 싫어! 절대 안 해!"


그렇게 시간은 30분 정도 흘렀던 거 같다. 완강한 권의 태도에 다들 오기가 붙었는지 권과 내가 뽀뽀할 때까지 집요하게 졸라댔다.

뽀뽀하라는 소리를 30분 동안 들었더니 이제 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야! 그냥 해 일로와"

나는 권의 턱을 잡고 내가 먼저 박력 있게 뽀뽀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샌님처럼 생겨서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뽀뽀를 쪽! 하고 다시 보니 갑자기 권이 남자로 보였다.


권도 그 순간 스파크가 튀었는지 그날부터 이 징글징글한 8년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권과 나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는 금수저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거친 세상과 단절된 화초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에 반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잡초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내향적이고 사교성 없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외향적이고 활발하고 사교성 넘치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ISTJ와 ENFP 단 한 글자도 겹치지 않는 두 세계관이 어떻게 융합이 되었는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당시 플랜트 가업을 승계받던 권은 갑자기 바빠진 인생을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짬짬이 나를 보러 찾아왔다.


권은 365일 내내 일하다 불시에 시간이 나는 생활 패턴이어서 우리는 계획적인 데이트는 꿈도 꾸지 못했다. 권이 시간이 된다고 회사 앞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나는 급반차를 쓰고 나와 우선 고속도를 달리다 갈림길이 나오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어디 갈지 검색을 하다 갑자기 파주 글램핑장으로 쏘는 식의 즉흥적인 데이트를 해야만 했다.


우린 다른 커플들처럼 매주 주말을 함께 보낼 수도 없었고, 권이 일을 모두 마친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만나면 열려있는 식당도 없어서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 와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낄낄거렸다.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도 권과의 대화는 항상 새롭고 재미있었다.  


"넌 연인 사이에 자기라는 호칭 쓸 수 있어?"

"아니 절대 못하지"

"나도 절대 못해 오그라들어"


우리는 달달하고 낯간지러운 사랑을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어서 둘 다 할 줄 몰랐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데 우린 고기를 구경조차 못해봤으니 서로에게 너무나 서툴렀다.

나란히 걸을 때 손잡는 것조차 어색했고 사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기댈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나 보다. 둘 다 깊은 잠에 빠져 의식을 잃으면 온몸에 쥐가 나든 말든 팔다리가 마구 뒤엉키도록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잤다. 그렇게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서로에게 진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


권은 이상한 남자였다.

어떻게든 스킨십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옷깃만 스쳐도 내외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역할을 자처해 새침한 권을 어르고 달래 진도를 뺄 수 있었다.


권은 나에게 사귀자는 고백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나는 권이 아부다비로 출국하던 날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인천공항을 찾아가 그를 기다렸고 인천공항 흡연구역에서 권이 내뿜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사귀자고 고백했다.


권은 심각한 회피형 인간이었다.

파나마 출장을 가서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나는 파나마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실종 신고를 하고 나서야 권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연락할 여유가 없었다는 황당한 소리만 지껄였다.  


어이없게도 이런 권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받고 싶었던 형태의 사랑을 그에게서 끝끝내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4년이 흐른 2019년에

제 발로 그에게서 떠났다.


그와의 이별은 보통의 이별과는 많이 달랐다.

평생을 함께한 가족과의 연을 끊은 느낌을 넘어서서 내 심장을 도려내는 느낌이었다. 나는 권과 헤어지고 난 뒤 생전 처음으로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이별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권을 용서하게 되었다. 그가 천하의 개새끼인 줄만 알았는데 8년간 그를 지켜보니 조금만 서식 환경이 바뀌어도 등껍데기 속으로 몸을 숨기는 자라새끼였다.


그가 개새끼가 아니라 자라새끼였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 뒤늦게나마 권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권이 나를 기만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지독한 회피형 인간이였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어서 모든 게 무지했던 거였다. 긴 세월 동안 무수히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만 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세상 쿨병에 걸린 사람처럼 전 애인과 다시 연락하는 건 구질구질하다 못해 꼬질꼬질하다고 경멸해 왔다.


이별 후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게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깟 사람 하나 잊는 것쯤은 의지 하나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나는 기어이 미련 한 줌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정리해 내고야 마는 독한년이었다.


하지만 누굴 만나고 헤어져도 이상하게 권과의 기억은 주기적으로 다시 떠올랐다. 다른 사람과의 기억은 나의 감정의 바다에서 뜰채로 모두 말끔히 건져내었는데, 권과의 기억은 수면 아래 깊숙이 가라앉아있다가 이따금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권도 나와 같은 증상을 호소했다.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내가 2015년을 어렴풋이 떠올린다면 권은 2015년에서 아직 머무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권이 나보다 훨씬 심각한 증상을 앓고 있으니 억울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왜 헤어졌어 근데?"

권이 나의 최근 연애가 실패한 이유를 물었다.


"잘 안 맞았어, 내가 공감능력이 없데"

"니가 공감능력이 뭐가 없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공감능력이 넘쳐흐르는데"  


권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항상 내 편이다.




"너는 친구 같기도 하고 아들 같기도 하고 아빠 같기도 해"

"나도 그래, 이상하게 너는 딸 같고 친구 같고 엄마 같고 그러더라"


우린 절대로 남녀 사이라는 범주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단지 몸이 외로워서 전 애인한테 전화를 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깟 섹스 따위에 국한된 사이가 아니었다.


우린 전화 한 통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다시 각자의 인생으로 돌아가 묵묵히 살아갔다.

그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으니까


"너네 진짜 징글징글하다 전생체험 같은데 알아봐서 같이 가봐! 대체 전생에 무슨 사이었을지 내가 다 궁금하다" 권과 나의 스토리의 전말을 아는 친구가 종종 했던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린 전생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을 것 같다.

아마도 부녀지간이나 모자지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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