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으로의 역행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by 손서율


이상하게도 요즘 나의 머릿속은 순수한 형태에 가깝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로 역행하는 것 같다.


그동안 유별나게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든 더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질 때도 있었고 신분 상승에 대한 집착을 가질 때도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다 보니 주변에 평범한 또래보다 더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으며 살 때 얼굴에 그늘이 보인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나는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다. 차라리 특정 부위를 지적받으면 원인이라도 알겠지만 얼굴의 그늘은 무엇이 원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29살에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극단의 우울감으로 나는 한없이 몸을 웅크렸다. 둥글게 더 둥글게 몸을 웅크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어차피 여긴 나 혼자뿐인 세상이니 앞이 보이지 않아도 부딪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갑자기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웅크린 몸을 일으켜서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디뎠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부딪칠 게 없으니 두렵지 않았다. 나는 결국 출구로 통하는 문을 찾아냈고 눈부시게 밝은 빛이 반겨주었다.


그날 이후로 성격이 180도 변했다. 그리고 그 후로 얼굴에 그늘이 있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거 알아? 너는 서른을 기점으로 성격이 아예 변했어 엄청 밝아졌어" 4년간 나를 지켜보던 애인이 자주 했던 말이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가능했다.


더 이상 잃을게 없어져서 성격이 밝아지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신기한 전환점이다.




변화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에 만난 애인도 나를 일 년 넘게 지켜보면서 내가 많이 변했다고 했다.


"성격이 정말 많이 유해졌어~ 나를 만나서 그래"


사실 그를 만나서 유해진 건 아니다. 나는 대부분 혼자 생각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성격이 유해진 부분 또한 나의 행동들을 3인칭 시점으로 들여다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성격이 밝아지고 유해졌는데 더 이상 바뀔 게 있을까?" 생각했는데 요즘은 순수하게 변하고 있다.


"순수함"은 단순한 변화가 아닌 "역행"이다.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거치고 탐욕과 집착을 거쳐서 결국 순수함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순수함으로 역행하기 시작한 지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그토록 갈망했던 회사에 입사하고 생각했던 조건과 달라서 찾아온 엄청난 스트레스는 머릿속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는지 신체적인 이상 현상으로 발현되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숨 쉬는 게 힘들어져서 사내 의무실에 급히 찾아가 혈압을 재보니 140이 넘어가 있었다. 간호사는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주면서 당장 조퇴하라고 했다.


몇 주 내내 술에 절어 살았다. 열심히 해온 만큼 그에 따른 배신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에게 가장 적절하게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를 읽게 되었고 "나도 글을 한번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10년 만에 펜을 잡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짓기라는 단어는 나에게 없었다. 단지 무의식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문장들을 글로 옮겼다. 내면에 겹겹이 쌓아왔던 아픔들을 글로 토해내니 진통제를 먹은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글을 쓰는 행위로 아직 돈을 벌지도 못했고 작가가 전업이 되어 권태로워져 버린 직장을 그만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점점 순수해졌다.


이전엔 수많은 "점"이 모여 이어진 나의 "인생이란 선"에서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작은 점"의 시점으로만 보며 인생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처럼 절망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금의 작은 점에서 벗어나 하늘로 높이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인생의 선 전체를 내려다보니 전혀 절망스럽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전진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귀엽고 기특하게 보였다.


인생이라는 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고 순수한 것들이었다.


순수함으로 역행하기 시작하면서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꿈들을 다시 꾸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글을 쓰고 난 기점으로 얼굴이 또 바뀌었다. 똑같은 메이크업을 해도 눈이 너무나 순해져서 평소에 했던 눈 화장이 안 어울렸다.


나 혼자만 느끼는 미묘한 차이인가 싶을 때쯤 3개월 전에 만났던 친구를 보았는데 나를 보자마자 눈매가 엄청 바뀌었다며 훨씬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정말 사람은 마음에 따라 얼굴이 변한다.


많은 걸 알면 알수록 결국 순수함이 정답이었다.


주변에서 보면 수많은 자산을 가진 부호들이 은퇴 후에 작은 별장을 사서 취미로 귀농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나이가 들어 자연이 좋아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좋은 건 다 하고 살아오신 분들인데 가장 좋았던 추억을 주는 공간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경험들 속에서 결국 마지막에 자연을 찾게 되는 건 순수함으로의 역행과 비슷하다. 자연은 순수함과 성질이 같기 때문이다.


어렵게 다시 되찾은 순수함을 평생 동안 잘 지켜내야겠다. 난 이미 정답이 뭔지 아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소신껏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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