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 나에게 주어진 사명

지구 상 최상위 포식자의 고뇌

by 손서율


"여왕님.. 안타깝게도 유산하셨습니다."


열여섯 번째 시도한 임신마저 결국 실패하였다.

힘겹게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에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잠든 채 편안하게 죽고 싶지만 애꿎은 목숨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도통 끊어지질 않는다.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요란한 공사 소리와 인부들의 웅성거림에 시녀를 불러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새로운 여왕을 모시기 위해 옆 침소에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보 중에 새로운 여왕이 확정된다면 즉위식 하루 전날 나는 숙청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돈하자 시녀가 다가와 이야기했다.


"여왕님 이네스 근위병이 찾아왔습니다."

"들라하라"


즉위식 때부터 항상 내 곁을 지켜온 오래된 벗과 같은 그녀가 전장에 나간 후로 한동안 궁안에서 볼 수 없었는데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여왕님께서 요즘 아침 산책을 나가시지 않는다 하여 오랜만에 함께 산책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나갈 채비를 마쳤으니 앞장서거라"


이네스의 뒤춤에 있는 독침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마지막 산책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기꺼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잔혹함으로는 어떤 시대에도 뒤지지 않는 이 왕정 스토리는 한 양봉업자의 유튜브에서 꿀벌들이 산란을 하지 못하는 여왕벌을 숙청하고 여왕벌의 시체를 벌집 밖으로 내다 버리는 영상을 보고 의인화하여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꿀벌 세계의 룰은 꽤나 정확해서 이 룰을 알고 있는 양봉업자는 벌집 앞에 버려진 여왕벌의 시체만 보아도 산란을 하지 못해 숙청을 당했다고 추측한다. 그의 추측대로 여왕벌의 시체가 놓인 곳에서 가장 가까운 벌통을 열어보니 산란한 알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벌집안에는 새로운 여왕벌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은 왕대가 10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 왕대 : 여왕벌이 될 알을 받아 벌이 될 때까지 기르는 벌집. 보통의 벌집보다 크고 민틋하게 길어 아래로 드리워진다.




꿀벌들의 세계는 경이롭다. 꿀벌의 신분은 여왕벌, 일벌, 수벌로 나뉘는데 그들은 신분에 따라 조직에서 맡은 사명이 다르다.


여왕벌은 집단에서 유일하게 번식력이 있는 암컷으로 5-10마리 가량의 수벌과 짝짓기를 하며 알을 낳는다. 여왕벌이 하는 유일한 임무는 오로지 번식뿐이다.


일벌은 모두 암컷이며 번식 이외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이들이 처리한다. 일벌 역시 암컷이기에 산란관을 가지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알을 낳지 않는다.


일벌들은 다양한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는데 여왕벌의 몸을 씻기고 로열젤리를 먹여주는 시녀 역할을 하는 일벌, 배에 있는 납선에서 밀랍을 생성해 집을 만들고 보수하는 일벌, 꿀과 꽃가루를 채집하고 급수작업을 하는 일벌, 다른 벌집에서 날아온 꿀벌이나 말벌을 상대로 전투를 하는 일벌 등이 있다.


수벌은 번식 기능만 가능하며 심지어 얘넨 독침조차 없다. 싸울 일이 전혀 없을뿐더러 먹이조차 자기 손으로 안 먹는다. 수벌의 유일한 임무는 여왕벌과의 짝짓기뿐이다.


이런 수벌이 마냥 꿀빠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정말 불쌍하다. 짝짓기에 성공하는 순간 생식기가 잘려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며 짝짓기에 실패한 수벌들은 짝짓기 시즌이 지나면 벌집에서 모두 쫓겨난다. 힘으로 버텨서 나가지 않는다 해도 일벌들이 먹이를 주지 않아 결국 굶어 죽는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조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면 철저하게 죽임 당한다.


한낱 미물인 꿀벌 주제에 뭐 그리 장렬하게들 사는지 모르겠다. 하긴 얘네가 내 이야기를 들으면 격분하겠지 나는 천적 때문에 매일 생존 걱정을 할 필요 없는 지구상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니.. 매일 반복하는 걱정이라곤 배달 앱을 켜고 리뷰를 살펴보며 이게 정말 맛있는 음식이 맞는지 걱정하는 거다.




하지만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도 고충은 있다.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조직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꿀벌 사회와 인간 사회는 매우 흡사하지만 내가 포함된 사회의 구성원은 일벌이 아닌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명체들이라니.. 이것 또한 만만치 않은 문제다.


가장 뛰어난 존재들이 만들어낸 사회에서 아직도 한참 부족한 내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이건 단순히 집단의 생존을 위한 사명을 넘어선 개인과 사회의 이상 실현까지 포함된 고차원적인 문제다.


연애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번식이 사명인 여왕벌은 불가능하니 일벌로 살아야 하는데.. 전투력도 없어서 전투벌도 불가능하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여왕벌의 시중은 어려울 것 같고 그럼 노멀 하게 꿀 나르는 사명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무슨 꿀을 날라야 벌집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그나마 소질 있는 글이라는 꿀을 날라야겠다.


혹시 모르지, 꾸준하게 열심히 나르다 보면 내 글이 이 사회에 로열젤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설사 로열젤리가 되지 못한다 해도 지구상에서 최상위 지능을 가진 인간이 만든 거대한 벌집에 내가 나른 꿀이 한 칸이라도 담기는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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