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바나나 우유를 먹지 않는다

by 손샤인

중학교 2학년 어느 저녁, 평소처럼 방과 후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날은 평범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야, 너. 잠깐 학교 뒷산으로 와봐.”


부른 사람은 소문난 선배 언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주저하다가도, ‘안 가면 더 큰일 나겠다’는 본능이 발을 옮기게 했다.


그곳엔 우리 반 지영이와 이름 모를 선배 언니들, 서너 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짝다리를 짚고 날 위아래 훑어보던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내 무릎 뒤를 발로 찼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눈앞에서 말이 쏟아졌다.


“너, 평소에 싹수없게 쳐다보지 않았어?”

“전…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어디서 말대꾸야?”


그리고 이어진 네 대의 뺨.

얼굴이 얼얼했지만, 울지 않았다.

마음속 어디쯤에선 이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얜 깡이 있네. 내가 찾던 애야. 엑스언니 동생하자.”

지들끼리 낄낄대며 웃었고, 검은 비닐봉지에서 뭔가를 꺼냈다.

빙그레 바나나 우유였다.

빨대까지 꽂아 내미는 손길이 왠지 더 무서웠다.

“앞으로 아무도 너 못 건드리게 해 줄게.”


무조건 살아남아야겠다는 마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이 떠난 뒤

혼자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볼은 벌겋게 부어 있었고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로 터질 것 같았다.

그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볼까 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성통곡했다.


“왜 그래, 딸?”

“그냥… 길에서 넘어졌어…”


그날 이후로

나는 바나나 우유를 입에 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난다.

그날 나를 무릎 꿇리고, 바나나 우유를 건넨 그 언니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가 되었을까.

그 시절을 잊은 채 누군가의 상사가 되어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문득문득 80년대의 한 소녀 얼굴을 떠올리기도 할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는 왜 아빠 발을 씻겨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