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잔류사학. 실수를 인정하지 마라. 거부하고 무시하고 비난하고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서 논점을 흐려라. 과거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래도 말이 되고 저래도 말은 된다. 역사는 사실과 해석의 줄타기이다. 역사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을 인용하지 않아도 되고,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해석을 과잉되게 해도 되고, 해석을 과소되게 해도 되고, 조금씩 거짓을 집어넣어도 된다. 방법은 무수하다. 변명은 끝도 없다. 반대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방법은 너무도 많다.
후배들. 토론을 진흙탕으로 끌고가라. 내용들을 견강부회하고 확대하라. 광신자의 헛소리로 귀결될 수 있도록 암시하라. 밤에는 비상식으로 휘갈기고 낮에는 상식으로 비상식을 비난하라. 찬양과 비난 속에 신물 나도록 하라. 관심을 갖지 말도록 유도하라. 논의를 개들이 싸우는 진흙탕으로 끌고가라. 진실을 향한 노력의 출발을 좌절시켜라.
신화와 전설과 무용담을 그대로의 진리로 취급하다니. 과거 역사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논리적 증거를 무시하다니. 진실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지원하다니.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무시하다니. 정확성, 일관성, 관련성, 완전성, 공평성, 정직성을 무시하다니. 유리한 증거만 선택하고 불리한 증거를 무시하다니.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대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양날의 칼은 과연 누구의 배를 가를 것인가
진실은 사서와 야사와 시와 유물과 지명변천과 한자전주원리들의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해석 속에 있다. 역사가 책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책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것도 불가능은 하다. 다만, 컵에 물이 반 밖에 없음과 컵에 물이 반이나 있음을 구분짓는 역사관.
역사실증주의라는 금과옥조의 방어막이 있었다. 역사에서는 검증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검증이란 "어떤 가설로부터 유도되는 결론을 사실의 관찰, 실험의 결과와 비교하여 그 가설의 진위를 밝히는 일"이다. 역사에서 실험 결과와의 비교라는 것은 대부분 무의미하다. 역사에서 사실의 관찰이란 과거 사실의 관찰이며, 그것은 주로 사료들과 유물들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사료는 결국 한정된 사실만의 기록이고, 또한 그 속에는 다양한 이유로 진실, 허위, 왜곡, 누락, 부정확들이 혼재되어 녹아있다.
유물은 과거 현상의 극히 일부분만의 잔존물이며 찌꺼기이다. 특정 유물이 어떤 가설에 잠정적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로리 볍씨는 쌀의 원산지가 한반도임을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유물이 되지만, 이 발견 이전만 해도 한반도는 전혀 쌀의 원산지로 여겨지지 않았다. 볍씨의 새로운 발견지 또한 항상 열려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서는 또 다른 원산지가 제시될 수도 있다.
검증이라는 것은 결국 부정확할수 있는 사료와 제한된 유물을 이용한 가설과의 비교일 뿐이며, 역사학에서의 검증은 수학에서 말하는 1 + 1 = 2의 방식이 될 수 없다. 역사 해석에서 검증만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을지문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차고 넘친다 해도 현재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으며, 을지문덕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고 을지문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