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쓰고 싶다
- 강순옥 -
나는 엄마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고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아이였다.
나이 5~6세에 나를 누군가가 이 집 저 집으로 데려다주면 남의 집에 청소하고 밥하는 일을 도와주면 살았다.
어느 날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고 깔깔 거리며 아이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나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그랬더니 옆집 할머니가 나오더니 "이것아 나도 엄마 아버지가 없다. 울지 마 왜 울어." 하신다
"나도 엄마 아버지가 있으면 저렇게 옷 입고 학교에 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엄마 아버지가 없는 거야"하며
한없이 울다가 땅바닥에 나무 가지로 글 쓰는 연습을 해 보았다.
나도 글씨를 쓰고 싶다.
나이 80이 넘어서야 연필을 잡고 글씨를 써 보니 손이 너무 떨려 글자 한자 쓰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지 글자는 톱니처럼 흔들여 삐뚤삐뚤 해도 기분은 새 세상이다.
나는 꿈이 생겼다.
내가 그 험난한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삶을 글로 쓰고 싶다.
요즘 책을 선물하는 일이 흔치 않다. 바쁜 일상생활 중에 책을 펼친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선물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선물하는 상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책을 고르고 선물할 수 있다. 상대의 평소 관심사나 고민거리, 취미생활과 특기, 종교, 정치 이념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선물로 건넨 책이 곧장 책장에 꽂히거나 냄비받침으로 사용되는 일을 줄 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내가 일하는 직장으로 시집이 선물로 들어왔다. 이 역시 애석하게도 수많은 자료와 책들 사이 한켠에 놓여 있었다. 사무실 청소를 하다 우연히 손에 잡은 '황혼에 핀 꿈' 이란 제목을 단 시집. 서점에서는 물론 찾을 수 없다.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발간된 책이 아닌 이유다. 시집의 제목을 곱씹어 보면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다름 아닌 청양군에서 진행한 초롱불 문해학교에서 느지막이 글을 읽고, 배우는 어르신들이 직접 쓴 글을 엮은 것이다.
가난해서 못 배우고, 전쟁통에 못 배우고, 어린 자식들 당장 먹여 살여야 하는 이유로 한글을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이 낮에는 농사일하시고, 밤에는 글공부를 꾸준히 해 오셨다. 들일, 밭일로 온몸이 쑤셔 오지만 구부러진 허리와 아픈 다리 이끌고 1주일에 2번 노인회관에서 열리는 '청양군 초롱불 문해교실'에는 빠질 수 없는 노릇.
배우고 돌아서면 금세 잊혀지는 ㄱ,ㄴ,ㄷ의 기억을 다잡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굳이 시집을 들춰보지 않아도 이 시집 한 권에는 어르신들의 그간의 삶의 눈물, 애환, 슬픔, 사랑, 기쁨, 한(恨) 등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이 담겨 있다. 앞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 역시 시집에 수록된 글 중에 하나다.
시집에 담긴 많은 글 들 중에 특히나 마음에 오래 남는 글이라 옮겨 보았다.
소녀(할머니)의 쓰리고 아픈 눈물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니 그 어떤 책 보다 값진 것이었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안타깝고 오래 기억해 두고 싶어 글로 남겨 남겨본다.
또 한편으로 나도 할머니처럼 글(씨)을 쓰고 싶었다. 시집을 읽고 얻은 지금의 내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다. 어르신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