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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May 22. 2023

우산 없는 날 비가 쏟아져도 비 피할 곳은 있다.

모스크바 근교 / 콜롬나 여행 (2)


콜롬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차분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러시아에 참 다양한 도시들이 있지만, 모스크바 근교 도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기. 이곳의 시간은 유독 느리게 가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맛에 근교여행하는 것인지라, 만약 무언가를 보기 위해 근교를 간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고, 이러한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근교 여행을 추천한다.


근교는 택시비도 매우 저렴해서, 기차역에서 시내까지 택시를 타고 싸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갔던 첫 번째 코스



카페 라줴츠니코프 (Cafe Lazechnikov)


이반 라줴츠니코프(1792~1869)의 이름을 따서 지은 카페 이름. 위대한 러시아의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콜롬나 사람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시절처럼 18세기 19세기의 느낌으로 카페 내부도 디자인하였고, 음식도 러시아스러우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으로 하고 있었다. 첫 코스로 정말 훌륭한 식당이었다.


매우 향긋했던 라벤더티. 만약 티백 팔았으면 사왔을 것 같다.
송아지 스테이크와 시그니처 디저트라고 추천받았던 케이크. 특히 케이크에 있던 오렌지 제스트가 너무 향긋해서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여유롭고 배부르게 맛있는 한 끼를 해결하고, 소화도 시킬 겸 거리로 나왔다. 식당을 가기 위해 걸었던 길이었는데, 그 길이 가장 메인 거리 중 하나였다. 콜롬나의 ‘성’인 크렘린이 오른쪽으로 보였다. 하늘이 흐릿한 것이 밝은 노래보다는 차분한 노래를 듣고 싶은 기분이었다. 20살에 처음으로 강릉으로 여행을 가서 혼자 노래 들으면서 걷고 새로운 곳들을 보는 즐거움을 처음 깨닫게 됐는데, 그때 무한재생하며 들었던 노래가 어반자카파 노래였다. 괜히 그때 그 마음을 떠올리고 싶은 기분도 들어서 센티한 기분을 즐기고자 어반자카파의 노래를 들으며 혼자 간지러운 감성을 즐겼다. 오직 내 취향으로, 나만의 감성으로 깔아준 고독함을, 내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게 나 홀로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다.



크렘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성벽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에, 성 안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문지기? 같은 분에게 물었더니, 아까 그 메인 거리에 가면 ‘리가 아트 갤러리’가 있으니 거기서 티켓을 사라고 했다. 투어 티켓을 사야만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으며, 지금이 1시인데 투어는 5시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가 아트 갤러리에서 티켓을 사고서, 그 옆에 있던 벼룩시장을 구경했다. 러시아어로는 야르마르카라고 하는데 아기자기 하니 귀여운 것들이 많았다.


보고 있는데 흐릿한 하늘에서 결국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거리인 만큼 기념품 가게들이 많기에 들어가서 ‘우산 파시나요’ 물었는데 신기하게도 우산 파는 곳이 없는 것이었다. 평소 때 모자를 잘 안 쓰는데, 비를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잠시 비를 피하다 보니 비가 조금 멎었다.


날씨를 미리 체크하고 우산을 챙겨야지 했는데 결국 우산 없이 오다 이렇게 된 것이다. 전날도 바쁘게 일하다 아침에 부랴부랴 가방 싸느라고 결국 우산을 빼먹은 내 탓이지 생각하며 다행스럽게도 호텔 체크인 시간이 되어 호텔로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했다.



그라즈단카 호텔 (Grazdanka Hotel)

3성급의 호텔이었는데 무려 14만 원에 육박하던 방이었다. 내가 갔을 때가 연휴였던지라 방들이 다 예약되고, 겨우 하나 남은 방 같았다. 그리 우수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비에 젖어서 추웠던 몸을 녹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짐을 풀었다.

딱 1인용 공간이었던 객실. 사진과 다소 달랐지만 1박만큼은 나만의 공간이라 생각하니 괜히 정감이 갔다.
헤어드라이기, 수건, 기본적 어메니티가 있던 호텔 그라즈단카. 왼쪽 사진에서 보듯 러시아에선 바닥에 물이 안 튀기게끔 샤워부스를 설치해둔다.


그리고 몸을 잠시 녹인 뒤에, 슈퍼에 가면 우산을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우산을 사고 다시 여정을 시작하고자 슈퍼로 갔다. 그런데 슈퍼에도 우산 하나가 없는 것이었다. 내 머리만큼만 가릴 수 있지만 모자가 있으니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걷기로 했다.


조금은 미련하게, 비를 맞으며 도착한 곳은 콜롬나가 관광지로 주목받는데 기여를 했다는 “파스 찔라 팩토리”



파스찔라 팩토리 (Pastila Factory)


콜롬나는 고대에는 모스크바공국과 함께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는데, 이후 다소 발전이 더뎌지다가 2000년대 이곳 파스틸라 팩토리가 19세기 의상을 입고 레트로 감성을 무기로 하여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가 ‘모스크바 근교 여행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비단 파스 찔라 팩토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가게에 가도 점원들이 19세기 러시아 의상을 입고 서빙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시작한 콜롬나의 감성이다.



아, 파스찔라는 이런 러시아의 전통 마시멜로와 빵 그 중간 어디쯤에 해당하는 디저트이다.



갑작스러운 비에 어떤 사람들은 가게 앞 천막 아래에 모여있기도 했고, 차가 있는 사람들은 허겁지겁 파스틸라를 급하게 사서 가느라고 다소 혼잡했다. 나도 그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진 못하고 떠밀려서 파스찔라를 기념 삼아 계산하고 나왔다.


그리고 나니 크렘린 투어 시간이 가까워져 크렘린으로 가려다 가는 길에 다시 몸이 으슬으슬해져 눈에 보이는 카페로 잠시 들어갔다.



도브리 토르트 (Dobry Tort)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본의 아니게 하루에 케이크를 두 개 부시게 됐다. 근데 웬걸, 치아시드가 잔뜩 박혀있는 베리 치즈케이크, 달지도 않고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몸이 사르르 녹았다.


새삼 나를 가릴 우산이 없이 비를 맞게 되더라도 중간중간 잠시라도 쉬어가니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줄 사람 하나 없이 맨몸으로 폭우를 맞는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는데, 내가 갖고 있던 작은 모자 하나로 흠뻑 젖지 않을 수 있었고, 이렇게 콜롬나에 왔듯, 그리고 이렇게 잠시 카페에 들러 몸을 녹일 수 있었듯, 잠시 쉬어가니 아픈 곳 없이 무탈히 이 날씨를 견뎌낼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아, 여기 참 잘 왔다” 싶었다.


토르트와 커피 하나에 깨달아버리는 인생의 가르침

그리고 다시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예약해 둔 크렘린 투어를 놓치지 않겠단 일념으로 성벽까지 다시 20분을 걸어갔다.



크렘린 (Kremlin)


성벽 처마 밑에 투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날씨가 너무 이상해!” “투어 끝나면 바로 호텔 가서 거기서 놀고먹자. 우리 호텔도 좋은데 오늘 너무 고생했어ㅠㅠ” 하면서 불평을 나누고 있었다. 와중에 성벽 지킴이 아저씨가 5시가 되었는데도 입장을 안 시켜주고 3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들의 불만 소리가 커지려는 찰나, 아저씨가 “들어오세요~” 하자 “우라~~~“(러시아어로 오예~이런 뜻이다) 하면서 다 같이 우르르 들어가는데 나도 덩달아 피식대며 기분 좋게 입장할 수 있었다.


 

옛날 전통 복장을 한 투어 아저씨가 이런 무기는 어떻게 쓰였고 등등 설명을 매우 재밌게 해 주었다. 올라가니 도시 전경도 구경할 수 있었고, 온 보람이 있다 싶었다.



투어를 하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 식당을 향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이국적 인테리어와 맛있는 생선 요리로 콜롬나 거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식당.



Sibas Lovelas

나 홀로 여행 1일 차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화이트 와인을 시켰다. 그리고 혼자 먹기 좋은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사실 파스타 맛은 그냥 평범했다. 이 식당이 유명한 이유인 생선, 굴 등 요리를 옆 테이블에서 시켜 먹던데 드라이아이스로 멋지게 데코도 해주고 맛도 좋아 보였다. 유일한 홀로 여행의 단점은 맛집에서 많은 양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콜로멘스키예 시드릐 (Kolomenskiye Sidri)


저녁 먹고 숙소로 가는 길에 콜롬나 로컬 시드르를 파는 상점을 발견해서 들어가 보았다.


아주머니께서 평소에 단 걸 좋아하는지, 스파클링이 있는 걸 좋아하는지를 물어보시면서 내 취향에 맞는 시드르를 추천해 주셨다. 시드르는 사과맛이 나는.. 샴페인과 와인 중간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거의 스파클링이 없다고 해도 완전 와인 같진 않았고, 샴페인에 가까웠다. 디저트 와인으로 괜찮았고, 취향에 따라 센 술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좋아할 맛이었다.


하지만 단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굳이 자주 애용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곳만의 무언가”라고 하면 무조건 맛보고 사 와야 하니까, 몇 개 사 왔다. 그리고 9시경, 숙소로 돌아와서 사온 시드르와 과자를 함께 먹으면서 나 홀로 콜롬나 여행 1일 차를 마무리했다.


비를 너무 맞아댄 바람에 좀 놀아보려다가 괜히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중간중간 몸도 녹이고 배도 채우며 돌아다닌 덕분에 아프지도 않았고 행복한 고단함으로 곤히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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