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 나의 청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white nights (백야)로 유명한데, 말 그대로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밤 12시쯤 되면 잠시 어두워졌다 다시 새벽 2시쯤 되면 해가 뜨는지라, 밤 11시임에도 마치 저녁 7-8시쯤인듯한 느낌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은 참 길고 힘든데, 여름이 기간은 짧을지라도 이 백야 현상 때문에 여름엔 하루를 더 길게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밤에 이런저런 즐길거리들이 더 많아진다.
백야 마라톤
그런 일환으로, 매년 6월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백야 마라톤이 열리는데, 밤 9시에 시작하는 10km 코스에 참여해 보면서 나도 상트의 백야를 즐길 수 있었다!
마라톤 전날 (레지스트레이션, 체력 아끼기)
달리기를 혼자 4-5km씩 뛰곤 했지만 마라톤에 참여해 본 적도 없고, 최근엔 일이 바빠 아주 오랫동안 연습도 못했어서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됐다.
상트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 마라톤 전날 마음 편히 갔다. 마라톤 전날부터는 레지스트레이션이 시작되는데, 전날부터 당일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
가서 번호표와 티셔츠 등을 받아온다. 그리고 모든 마라톤이 그런진 모르겠는데, 러시아에서 마라톤에 참여하려면 의사의 건강에 문제없단 소견서가 필요한데 이걸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전날 등록 절차를 무사히 마쳤다.
친구는 모스크바에서 내가 가니, 재밌게 놀아주려고(?) 달리기 전날임에도 밤 12-2시 클럽 코스도 짜두고 늦은 밤까지 살짝쿵 무리하는 일정을 계획했었다. 나는 다음날 체력을 풀로 채우기 위해서 전날 힘을 아끼고자 밤 2시 정도까지만 집에서 맥주만 조금 기울이며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마라톤 당일을 맞았다.
마라톤 당일, 시작 직전 (먹고 쉬고, 출발!)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가 데려가준 인도 식당에서 달리기 전에 든든히 먹는단 핑계로 아주 거나하게 식사를 하고, 이삭 성당 앞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들고 미니 피크닉을 즐긴 뒤 마라톤 준비차 오후 5시쯤 다시 집으로 왔다.
경건한 마음으로 30분 정도 낮잠을 자고, 바나나 하나, 그리고 어제 등록할 때 받았던 프로틴바를 먹고 7시 반쯤 집을 나섰다.
마라톤 본격 시작!
백야마라톤은 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자체의 큰 행사여서 도로들이 통제된다. 그래서 우리도 택시를 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시작 지점으로 갔다.
지하철 곳곳에 마라톤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지하철역에 내리니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인파를 따라가다 보니 출발지점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마라톤을 신청할 때 예상 달리기 시간을 적는데, 나는 첫 도전이었어서 “1시간 이상”을 별생각 없이 눌렀는데, 제일 못 하는 그룹으로 구분되어 H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출발지점에 가면 A~H 그룹의 출발지점이 나뉘어있는데, A그룹부터 9시가 되면 출발하게 된다. 나는 9시 20분쯤 출발하게 됐다.
친구는 마라톤 경험이 있어서 먼저 앞서 가는데, 나는 페이스 조절을 위해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갔다.
처음 2km까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뛰는 거라 몸을 데우는 데까지 힘이 제법 들었다. 3km쯤 되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눈도 너무 행복했지만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서 있었는데, 이때 말로만 듣던 러너스하이를 느꼈던 것 같다. 갑자기 행복한 엔도르핀이 돌기 시작하면서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것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오히려 힘들지 않게 달릴 수가 있었는데, 거리 곳곳에 서서 “말랏찌~~~~ (잘하고 있어 너희!!)” 를 외치고 우리를 향해 박수를 치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나는데, 그분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다른 사람을 응원하며 저렇게 행복해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놀라기도 하였고, 모르는 누군가가 저렇게 다른 사람을 진심을 다해 응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뭉클한 인류애(?)를 느끼기도 했다.
가는 동안 팻말을 들고 응원 문구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북과 악기를 들고 나와 공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와 함께 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분들도 참 많았는데, 그렇게 응원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 나도 보이는 손마다 다 하이파이브를 착착착, 꼭 치고 지나갔다.
고사리 같은 아기들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며 지나가면 그 마음이 너무 귀엽고 따뜻해서 더욱 힘이 나곤 했다.
그리고 9km 지점, 끝이 다 와가자 다시 숨이 차기 시작했는데, 길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왔어!!! “ 하는그 순간, 화려한 피니시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 성공적으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10km라는 게 어떻게 보면 짧은 거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 거리를 달리는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청춘을 상기시켜 준 백야 마라톤
대학교 1학년 러시아어를 처음 배우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에 가보고 싶어 노트북 배경화면을 설정해 놓고 동경했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약 10년쯤이 지난 지금. 이렇게 황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석양을 오롯이 즐기며 이곳을 달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간 러시아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이곳에서 달리고 있단 생각에, 청춘의 한 페이지 속에 있음에 감사했다. 그냥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들에 새삼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바쁜 하루하루에 치여 내 젊음과 청춘의 아름다움에 대해 바라보지 못했었는데, 새삼 ‘지금이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라는 걸 느껴보며, 온전히 하루를 살아야겠다 싶은,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런 기억들을 가지고 앞으로의 나날을 또 버텨내야겠다 싶은데..!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드는 생각.
역시,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인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참 경험이었다.
예상보다는 많이 힘들지 않았던데 비해 내가 느낀 행복함은 너무 컸던 벨리예 노치(백야) 마라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참여해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