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크리스마스 인 유럽
호텔에서 짐을 찾았다. 파리는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빗방울을 뿌리고 있고, 바람도 불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호텔과 연결되는 지하통로를 통해서 Porte Maillot 역으로 캐리어를 탈탈탈
끌고 갔다. 파리에 올 때보다 좀 더 무거워진 캐리어.. 등 뒤에는 큼직한 배낭.. 크로스백..
한창 퇴근시간이어서 메트로 안이 복잡해 짐이 여러 개인지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신을 바짝 차리자! 바짝 차리자! 를 되뇌고, 어디.. 내 가방에 손만 대봐라~ 하고 리옹역 (Gare de Lyon)까지 갔다.
물론 불상사는 없었다.
리옹역에서는 19:59 밀라노행 야간열차를 타야 한다.
한국에서 올 때부터,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은 국가 간, 또는 도시 간 이동시 과연 제대로 우리가 열차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인가? 였다. 기차로 국경을 넘은 것은 고작 런던과 파리를 오갈 때, 유로스타를 한번 타본 것뿐이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밥먹듯이 기차를 타야 하고 제대로 기차를 타지 못한다는 건 모든 일정에
차질을 가져올 수 도 있다는 얘기였으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열차 타기에 급급한 나머지 열차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그 시간만큼은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손미나 작가가 쓴 「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에서, 세계의 축소판인 파리, 그것을 다시 한번 축소한 것이
파리 리옹역..이라 묘사한 것을 보고 글을 읽을 당시는 어떤 곳일까 굉장히 궁금하고, 책에서도 등장하는
리옹역 2층의 트랑 블루 (Le Train Bleu ) 레스토랑도 무척이나 궁금했었는데,
정작 리옹역에 있을 당시는 그곳에 가볼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약 두 시간을 대기 한끝에 밀라노로 향하는 THELLO 야간열차에 올랐다.
우리는 6인 쿠셋을 예약했었는데, 한쪽 라인의 upper와 middle seat였고, 약 11시간을 타야 하는
상황이어서 좀 불편할 듯도 했지만, 보통은 모든 좌석을 다 채우지는 않는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약한 번호의 쿠셋에 들어간 순간 남자 두 명이 떡하니 들어가 앉아있었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잠시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좌석이 middle seat 고 뭐고 형 양과
나는 냅따 양쪽의 upper seat에 올라가서 내릴 때까지 천정에 붙어서 자기로 했다.
사다리를 타고 upper seat로 올라가서 캐리어를 올릴 때는 이미 들어와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신사도를
발휘해서 짐을 올려주어서 고마웠지만, 그래도 맘속으로 난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을..
6인 쿠셋은 대개가 성별 구분을 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 남자들이 제대로 자신들의 쿠셋에
와 있는 건지, 최소한 나는 확인이 필요했다. 11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난 검표원도 아니면서 그들 중 한 명에게 티켓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 순순히 자기 티켓을 나에게 보여준다..
근데.. 맞는 거다.. 우리와 같은 쿠셋.. 한편으로는 안심을 하고, 이들과 11시간을 꼼짝없이 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며, 인사를 건네었다.
인사를 마치고 조금 있다가 보니 다른 쿠셋에 있던 이들의 친구들이 우리 쿠셋 앞으로 몰려와 떠들기 시작했고, 그들 중 한 명은 우리에게 또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더니 Oh! Korea~! 태권도~! 하면서 태권도의 기본 중의 기본인 양팔을 앞으로 쭉쭉 뻗는 시늉을 하는 거다.. 형 양과 나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조용히 취침을
하고 싶었기에 제발 너희 방으로 돌아가~!라고 한국말로 작게 얘기하고 있었다.
누가 야간열차에 낭만이 있다고 했던가? 아마도 낭만을 느끼려면 오리엔탈 특급열차쯤은 타 줘야 할 것이다.
모양만 봐선 흡사 감옥이 따로 없다. 소음 차단 목적으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의 음악을 틀었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잠들기 힘든 밤이다.
그렇게 얼마간을 자던중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사이 어느 역에서 몇 명이 더 들어와
아래층은 바글바글한 느낌이었다.
인원수 제한 없는 인도의 열차가 연상되기도 했으나 우리는 아래층보단 나은 편이라 감사하기로 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진리 같은 말씀이다.
예정대로라면 밀라노역에 야간열차는 다음날 6am에 도착을 해야 하고, 우리는 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유레일패스를 activation 해서 밀라노역에서 유레일패스에 스탬프를 받은 후에 7am 로마행 TRENITALIA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야간열차 THELLO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7am 로마행 열차 출발 3분 전에 열차에 올라탔다. 유레일패스 activation도 하지 못한 채..
헐~ 유레일패스를 activation 하지 않은 채로 열차를 타고 차장한테 걸리면 벌금인데.. 일단 날짜라도 적어놔 보자.. 열차를 잡아타는데 너무나 힘들었던 나머지, 지정좌석에 갈 힘도 없어서 통로에 주저앉아 유레일패스에 날짜를 기재했다
마침내 검표 시간.. 역시나 스탬프도 안 찍고 유레일패스도 open하지 않은 것에 대해 뭐라고 했으나
착한 검표 아저씨는 유레일패스에 꼬부랑꼬부랑 숫자를 쓰더니 로마에서 스탬프를 받으라고 하신다.
휴~~ 하나하나가 힘들다.. 하지만 내 평생에 이런 경험의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게 된다.
편하든 편하지 않든 이건 여행이고, 여행은 낯선 것과의 만남이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