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세인 Feb 20. 2024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일곱 번째 반항

당당하고 의로운 인물이던 욥은 폭풍우로 아들과 딸들을 잃었다. 욥은 늘 신께 신실했기에 어째서 그런 고난이 자신에게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욥 또한 자신이 지은 죄를 떠올리며 고통에 빠졌다.

사실, 욥은 신의 우주적 도박 대상이었다. 신이 사탄에게 욥의 신심이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려고 했고 욥은 그걸 모른 채 자신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마침내 신은 욥에게 말했다.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도 비는 내린다."


신에게 선택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것인가?
아니면 인간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은총의 선물로서 구원을 얻은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서 욥의 이야기는 신의 전능함에 손을 들었다. 구원은 노력과 무관한 산물이며 신의 질서는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꽤 오래 받아들여져 왔지만 어쩔 수 없이 그로 인한 인간의 무력함은 커져갔다. 그리고 때때로 '신의 대리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선 자유의지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고 반 능력주의적인 엄격한 은총론은 능력주의적 섭리론으로 변화했다. 인간은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갖게 됐고 구원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 됐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 행위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우리에게 풍요와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렇다고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성공을 신의 섭리로 보고 이 믿음을 통해 내가 마땅히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 것을 갖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즉,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섭리적 계획의 일치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러한 섭리적 신앙은 성공에 도덕의 틀을 씌었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고 그는 스스로를 도운 자다.

실패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실패했으며 스스로를 돕지 않은 자다.

이러한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신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리셨도다."

신의 은총은 무조건적인 선물이 아니며 내가 받아 마땅한 것, 사실상 내 힘으로 성취한 것이 되었다.

신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과 감사함은 사라졌고 이제 신은 염원의 상대가 아닌 내 성공의 도덕성을 확인시켜 주는 확언의 대상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신과 인간

이제 신의 은총은 부와 같은 세속적 성공으로 대체되었고 신의 섭리는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신 없는 섭리론'이 되어 그 자체로 신과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됐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 능력에 대한 상 또는 벌이 되었다.

내가 아프고 병든 것도 단지 불운이 아닌 내 잘못이 되고 가난도, 심지어 재난도 내 잘못이 된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진 사람들은 이를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업신여기게 된다.


이처럼 현대의 섭리론인 능력주의는 일이 잘되어갈 때는 모두에게 이롭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꺾고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고난은 곧 죄의 표시라 생각한 욥의 친구들은 그를 비난했고 욥 또한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고통받았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했지만 신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그리고, 욥과 그 친구들이 가졌던 능력주의 가설과 희생자를 단죄하는 잔인한 논리를 부정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의 전지전능함을 알리기 위해 전해졌던 욥 이야기가 능력의 폭정이 극에 달한 지금은 인간의 잃어버린 겸손함을 되찾도록 하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신의 전능함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능력 또한 드높이 띄워버리면 그만큼 그림자가 깊어지기 마련이다.



Reference: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크 샌델
이전 06화 우린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