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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이 Sep 27. 2021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당신, 지금 페미니스트인가요

“페미니스트냐고는 물어보지 않을게”

폭스뉴스의 간판앵커 메긴 켈리가 트럼프의 여성을 향한 성희롱 발언을 지적하자 그의 동료가 켈리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페미니스트냐고는 물어보지 않을게”다. 페미니스트가 아님이 확실한 당신이 왜 페미니스트가 할 법한 일을 하느냐는 이 물음은 당신은 페미니스트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메긴 켈리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미국의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폭스’의 앵커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원하는 것은 진보고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보수이니 변화를 원하는 페미니즘은 진보의 산물이다' 와 같은 흐름에서 생겨난 인식이거나 ‘여성’이기 전에 보수언론의 앵커이므로 사측의 이익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일지도 모른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켈리와 트럼프의 설전 배경에도 폭스의 동의가 있었다. 이후 트럼프의 비난성 트위터 공격에 세간의 집중을 받은 켈리는 사측에 보호를 요청하지만 폭스뉴스의 회장, 언론 권력의 제왕 로저 에일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 단 하나. 이 설전이 시청률이 되느냐 아니냐다. 미국의 미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트럼프의 여성혐오성 발언과 왜곡된 성인식은 로저의 관심사가 아니다.

      

진짜 권력과 가짜 권력  

도움을 요청하는 켈리에게 그는 도 넘은 악플은 혐오가 아니라 못 박는다.

 “그들은 방에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고 너는 앵커야. 혐오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할 수 있는 거야.”  

자신의 사업 안에서 여성을 소모시키는 그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남성’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리선이 부각되는 옷차림에 다리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를 강조하면서도 그는 떳떳하다. 당사자인 여성 중 몇몇도 그런 그의 관심 덕에 여성이라면 으레 존재하는 유리천장을 뚫고 승진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남성 동료들은 외모가 여성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당연시 한다.

자신들의 외모를 소비하기 위해 남성이 쥐어준 권력으로 우뚝 선 여성들은 후배들에게 성공의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보수당을 지지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케일라 역시 그들 중 하나다. 성공하기 위해 직접 로저 에일스를 찾아간 케일라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충성을 약속하고 프로그램 앵커로 자리매김 한다. 그 과정에서 케일라는 극심한 정서적 피해를 입지만 자기혐오로 뒤덮인 그녀가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케일라는 여성직원을 향한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고 그를 고소하기 위해 1년을 넘게 준비한 그레천 칼슨이 그의 실체를 폭로한 후에도 그녀는 쉽사리 피해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연대가 필요한 이유 

폭로를 한 그레천이 가장 원한 건 자신의 고백에 힘입어 용기를 내줄 동료가 단 한명이라도 나오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 연락을 해오는 피해자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적지 않았음에도 나서는 이가 없었던 이유는 피해자 대부분이 가해자가 처벌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메긴 켈리 역시 그레천의 고백에 연대하기 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케일라는 자신을 찾아온 켈리를 비난한다. 알고 있었다면 자신은 성공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켈리는 그 누구도 누군가를 보호할 의무는 없다고 답하고 자리를 뜨지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2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듣고는 생각에 잠긴다. 가해자는 한 명이지만 범죄로 인한 피해에 피해자들이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성범죄가 악질범죄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2020 우리의 모습은

2016년 폭스 뉴스 스캔들이 터지고 4년이 흘렀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 열풍이 불었고 2015년 대한민국에서도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시작으로 많은 것들이 세상에 밝혀졌다. 영화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졌다. 정봉주 전 국회의원이 미투를 통해 가해자로 지목됐을 때 진보 평론가 김어준은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미투가 정치적 공세라는 것. 피해자의 피해사실보다는 정치적 이익이 우선인 모습을 주저하지 않고 내보였지만 결국 정봉주 의원의 미투는 사실로 들어났고 그들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안희정 전 도지사 미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또 다시 피해자보단 가해자의 입장에서서 사건을 바라봤고 결국 미투는 사실로 들어났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범죄 고발과 동시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시장이자 인권변호사로 반평생을 살았던 가해자의 죽음 앞에 국민들을 대변한다는 정치권에서는 앞장서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르며 피해사실을 지워나갔다. 고소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초반의 주장과 달리 여성학을 전공하고 인권운동을 해온 임순영 전 젠더특보가 사건을 미리 파악해 보고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연대하고 있는가. (관련기사ㅣ여성운동 동지가 박원순을 보내는 방법 - 시사IN (sisain.co.kr) )

    

사법적으로 결론이 안 난 사건이라 조심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수많은 정치인의 추모글 속에는 가해자의 공적 외에 고소를 한 피해자에 대한 우려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여러 정황 속에는 외모를 기준으로 여성 비서를 채용하는 방식 등 여러 부조리가 담겨 있다. 피해자의 피해에 연대하는 또 다른 피해자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당사자가 사망하여 사법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이 사건을 계기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시됐던 시절의 종말을 고해야 한다.      


얼마 전 라디오스타에 나온 핫펠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며 페미니즘의 정의를 설명했다.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사상’

여전히 여성의 피해에 여성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너 페미니스트야?”라고 묻는다면 되묻고 싶다.

 “당신, 지금 페미니스트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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