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사람이다.

by 수이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프니까 사람이다.


작년부터 할머니는 염증 수치가 툭하면 치솟아 응급실로 실려가기 일쑤였다. 알고 보니 할머니의 고관절 뼈가 염증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메마른 나무가 천천히 썩어가는 것처럼. 서는 것도, 앉는 것도, 누워 있는 것조차 할머니에게 고통이 되었던 이유를 그때야 알게 됐다.



할머니댁 거실에 있던 소파를 치우고 낮은 침대를 거실로 옮겼다. 화장실이든, 부엌이든 최대한 이동거리가 짧아질 수 있도록. 고통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도록.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쓸만해 보이는 침대 위에 한없이 약해진 할머니가 누워있다. 거실에 어울리지 않는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 할머니, 아프지 마.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 안 아프면 그게 사람이냐?!



평소의 온화한 말투는 없었다. 짜증 서너 스푼 섞인 듯한, 고통으로 날 선 목소리.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늙고 병약해진 몸 앞에선.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에게 아프지 말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공허한 위로 아닌 위로 같아서.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덜 아팠으면 좋겠어. 조금만 아프자.








영희의 결혼식이 끝났다. 당연하듯 온 가족이 할머니의 병실에 모였다. 엄마도, 삼촌도, 외숙모도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난) 영희를 제외한 5명의 손녀 손자들도.



할머니의 입은 여전히 다물어지지 않았고, 그 사이로 메마른 숨만 왔다 갔다 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간신히 뜬 할머니 앞에 춤을 추며 퇴장하는 영희의 결혼식 영상을 틀어드렸다. 흔들리던 눈의 초점이 핸드폰을 향하더니 영상이 끝날 때까지 화면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오랫동안 바라왔던 순간인 것처럼.



영상이 끝난 뒤 할머니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 온 힘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얇은 쇳소리일 뿐.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엄마는 옆에서 할머니의 마른 입술을 젖은 거즈로 닦으며 말했다. 엄마~ 못 알아 들어서 너무 미안해.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최진영 작가님의 소설처럼, 온 힘을 다해 겨우 뱉어냈던 할머니의 쇳소리도 과연 사랑한다는 말이었을까?







병실을 떠나기 전, 우리들은 차례대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고 싶은 말을 힘겹게 꺼냈다. 꾹꾹 참아온 눈물이, 간신히 눌러온 울음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모두들 눈물이 범벅되었다. 마지막을 인정하기 싫어서일까 우리 막둥이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할머니 품에 안겨 눈물만 흘렸다.



첫째 손녀인 나의 차례가 가장 마지막에 왔다. 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할머니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누가 들을까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머니, 오늘 영희 결혼식 아주 잘 마쳤어.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 이제는 편하게 쉬어도 돼. 그래도 돼 할머니.







간발의 차이었다. 집에서 5분만 일찍 나왔다면, 지하철 한 대를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지 않았다면, 붕어빵을 사지 않았다면.



영희의 결혼식 이틀 뒤,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갔다. 동생이 병실 문을 열자마자 뒤에 있던 나를 쳐다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뭇 다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눈물로 얼룩진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항상 담담하게 할머니를 돌보던 엄마가. 적어도 내 앞에선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엄마가. 엄마... 엄마... 를 끊임없이 부르며 울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할머니 옆에서 할머니 손을 꼭 붙잡은 채로.



한껏 편안해진 얼굴의 할머니가 누워있었다. 할머니의 얼굴, 손, 발의 온기도 그대로였다. 따뜻한 양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고 회색빛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해 할머니. 내 할머니가 되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그리고 나선 그간 하지 않았던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 아프지 마. 그곳에선.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감히 엄마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