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친구와 비밀을 속삭였던 학창 시절의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친구와 나누었던 수많은 비밀 중 기억나는 것은 몇 없지만,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또렷하다. 털어놓는 이는 해방감을, 듣는 이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은 ‘너와 나’에서 ‘우리’로 묶인다. 이렇듯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누군가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가장 쉽고도 빠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비밀을 나누는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어떠한 비밀이든 공유되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비밀은 필연적으로 누설의 운명을 맞는다. 공개되기 전까지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밝혀짐으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며, 완성되는 즉시 파괴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밀의 정의이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고자 한다. 비밀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 비밀을 파괴하여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첫째, 나는 중요한 날이면 꼭 귀여운 양말을 신는다.
중요한 날이라면 발표, 면접, 시험, 소개팅 등의 일정이 잡힌 날을 뜻한다. 평가받는 자리에 갈 때는 귀여운 양말을 신어야 마음이 놓인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 또한 평가받는 것이므로 브런치 글을 쓰는 날도 물론 중요한 날에 속한다. (네, 저 지금 곰돌이 양말 신었어요.)
발목부터 발끝까지 씌워진 귀여운 천을 보면 기분이 가벼워진다. 무섭고 부담스러운 자리에 가야만 하는 발걸음의 무게를 덜기에 제격이다. 우아한 양말이나 아름다운 양말, 단정한 양말보다는 귀여운 양말 쪽이 아무래도 가벼운 느낌이니까. 또한,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샘솟는다. ‘한껏 몰두하는 어른처럼 보이지만 발끝에는 귀여움을 숨긴 나, 제법 멋지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빽빽한 긴장의 밀도를 낮추고 조금이나마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둘째, 나는 자정을 넘겨 새로운 하루의 운세를 확인하고야 잠에 든다.
초록창과 노란창에서 생년월일, 별자리, 띠별 운세를 모두 확인하고 그중 제일 좋은 것을 믿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2023년 3월 18일에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는 카카오의 생년월일 운세를 믿기로 했다. 한창 심취해 있던 시기에는 사주 앱까지 다운받아서 보곤 했으나, 현재는 지운 상태다. (운세 확인을 자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핸드폰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운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고, 잠들기 전에 거치는 루틴에 가깝다. 피로와 피곤에 못 이겨 소위 ‘뻗어버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지키는 루틴이자 습관이다. 마뜩잖은 하루를 보낸 날엔 더 나은 내일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족스런 하루를 보낸 날엔 오늘 같은 내일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치 주문 같은 한 문장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글머리에서 보인 비장함에 못 미치는 비밀이었다면 심심한 사과를 건넨다. 비밀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시시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건 비밀 축에도 못 낀다며 코웃음을 친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밀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2.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즉 비밀이란, 숨겨야 하는, 알리면 안 되는 일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털어놓은 두 가지는 비밀보다 일상에 가까워 보일지 모른다. 굳이 숨겨야 할 필요도 없으며, 알려져도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비밀임이 분명하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양말과 오늘의 운세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안정을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다.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은, 노력해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 내 일상의 주된 정서는 불안이다. 나는 늘 불안하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을 상회하는 불안을 느끼곤 한다. 나의 비밀은 바로 불안이다.
나는 언제나 불안을 느껴왔으나 그렇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숨겨왔다. 오랫동안 내 속에서만 묵어온 무언가가 지금, 이 글에서 드디어 비밀로 완성되었다. 이 비밀을 완성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남모르게 애쓰는 스스로가 처량했기 때문이다. 불안이 곧 불행은 아니라며 자위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비밀로부터, 그러니까, 불안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녹아있는 불안이 존재감을 발휘하면, 곰팡이 핀 식빵처럼 금세 얼룩덜룩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을 알아채는 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불안이 기지개를 켜면, 가장 먼저 잠이 조각난다. 일상적인 불안이 불안한 일상으로 전복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도 몇 번이나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며 서너 개의 꿈을 꾼다.
그리고 다시, 잠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양말과 운세, 그리고 비밀의 완성과 파괴까지 부단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은 아직 먼 듯하다. 아마 당분간은 몇 개의 꿈을 손에 쥔 채로 잠을 조각들 사이를 서성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