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코스모스는 꽃이 아니었다.

<대치동 삽니다>

by 수레 soore


수행평가에 목숨을 걸었다.


선생님의 눈에 띄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눈에 띈다는 건 곧 수행평가 점수로 연결된다는 걸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것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과목별로 뽑는 국어 부장 수학 부장 생물 부장이 바로 나였다. 국어 시간이 되기 전에는 피피티를 띄워놓고, 과학 시간이 되기 전에는 교무실로 뛰어가 선생님의 실험 도구를 대신 날랐다.


수학 부장은 간단했다. 반 친구가 수학 문제를 모르겠다고 가져오면 내가 풀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수학 부장이었던 한 학기 내내 나에게 온 친구는 없었다. 우리 반엔 수학을 잘하는 친구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뭐, 상관없었다. 아니, 편하고 좋았다. 그저 나는 생기부에 들어갈 한 줄이 필요한 거였으니까.

‘이 학생은 한 학기 동안 수학 부장으로 활동하며 같은 반 급우들의 문제풀이를 도와줌.’

이 한 문장이면 되는 것이었다.


요령이란 게 없었다. 그냥 무조건 긴 생기부가 장땡인 줄 알았다. 생기부가 꽉꽉 차서 20장 30장이 넘어가면 대학에 붙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다 나갔다. 내 진로 사항이 뭔지, 일관성은 어디 내팽개쳐두고 생기부에 적히는 활동이라는 활동은 닥치는 대로 나갔다.




고등학교 1학년, 과학경시대회가 열렸다. 경시대회랄 것도 없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읽어오면, 책의 내용을 가지고 퀴즈 시험을 보는 거였다. 마침 과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귀띔을 해줬다.


"어지간히만 풀면, 생활기록부에 적어줄 생각이야. 많이들 도전해봐!"


<코스모스>라는 책은 처음 들어보는데, 과학 책인가? 무슨 식물도감인가?' 생각하며 참가 신청서를 냈다.

꽃은 좀 알고 있는 터였다. 어지간히만 풀면 된다는데, 굳이 읽어갈 필요가 없었다. 눈치를 보니, 참가만 하면 생기부에 다 적어주실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시험장으로 갔다. 코스모스는 식물도감이라고 굳게 믿었다.


1주일 후, 과학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빈아, 너 <코스모스> 책 한 번이라도 펴 본 적 있어?”


질문에서 알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알았다. <코스모스>는 내가 아는 그 코스모스가 아니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꽃과는 전혀 상관없는 엄청난 두께의 천문학 교양서였다.


교내 과학 경시대회에서 유례없는 0점 가까운 점수가 나왔고, 시험을 본 59명의 학생 중에서 나는 유일하게 생활기록부에 무엇도 적히지 못하는 학생이 됐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 <코스모스>가 그 코스모스일 거라고 굳게 믿고 시험장에 들어갔으니까.



코스모스가 천문학 책이었을 줄이야!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기억이 난다.

수빈아 너, 가끔 보면 좀 과해.


엄청나게 민망하고 끔찍하게 부끄러웠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생기부에 써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그러면 가봐도 되죠?”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걸로 울어서는 안 됐다. 그냥 내가 좀, 알 수 없는 이유로 안쓰러운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본인 제외!)

*구독으로 응원해주세요


<대치동 삽니다>

매주 수요일 / 토요일 연재됩니다.

contact: soobin3466@naver.com

더 읽어보기

https://brunch.co.kr/@soobin3466/12

https://brunch.co.kr/@soobin3466/15

https://brunch.co.kr/@soobin3466/14


작가의 다른 채널:

네이버 포스트 https://post.naver.com/soobin346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