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동네의 가장 높은 건물 가장 높은 층에 사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이었다. 주홍빛 석양이 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홀짝이는 건 매일 스카이라운지 티켓을 사는 것과 같았다. 벤 Ben과 나는 하루를 마칠 무렵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래도록 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언젠가 그에게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아이보리 색 커튼이 바람에 날리던 교실. 3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아무도 없었다. 선택하지 않은 혼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홀로 급식실에 앉아 밥을 먹을 땐 매 순간이 고비였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냐고 묻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항상 웃던 얼굴에 참담함이 비쳤다.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는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매를 길게 늘여 아닌 척 눈물을 훔쳤다. 5년도 더 지난 일이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소매가 다 적셔지도록 눈을 덮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의자를 끌더니 내 옆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나를 안았다.
안겨 울 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나의 눈물이 타인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가 푹 젖어버린 소매로 눈을 감싼 나를 안고 어깨를 두드리는데 거짓말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위로받지 못한 상처가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쓰레기통을 뒤져 구겨진 쪽지를 꺼내듯 썩혀둔 상처를 조심스레 펼쳐 한 구절 한 구절 보듬어줬다.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마주 앉은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조금씩 나를 바꿔갔다.
우리에게도 마지막 저녁이 와버렸다. 벤은 엄마의 레시피로 렌틸콩 요리를 해주겠다며 분주했다. 포도주스 한 잔을 따라놓고 렌틸콩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이 한 접시를 한국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는 나를 유심히 보던 그가 뜬금없이 미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려져 네 미래.”
“뭐? 네가 본 내 미래가 어떤데?”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어. 정장을 입고. 아주 바빠 보여.”
“너는?”
“나는 아프리카에 있지 않을까, 내 열정은 거기에 있거든.”
“이게 정말 우리의 마지막일까? 다음이 있겠지?”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면 하나만 약속해줘. 이곳에서의 삶과 한국에서의 삶이 많이 달라도 지금을 그저 하룻밤 꿈으로 치부해버리지 않겠다고. 네가 여기서 이룬 것들을 봐. 너는 혼자 이 먼 곳까지 와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사람이야. 네가 여기서 쌓아 올린 것들을 절대로 잊지 마.”
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스웨덴에서의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한국에 돌아가 다시 마주할 일상을 두려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걱정이 느껴졌다. 그 따스함이 그리울 것 같았다.
“그럼 나에게도 하나만 약속해줘. 절대로 위험하지 않기로. 난 뉴스에 아프리카가 나오면 평생 널 생각할 것 같거든.”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인연을 믿는 나에게 아무래도 이번 생은 축복이라고 믿게 해 준 너였다. 맛있는 걸 함께 먹고, 스웨덴에서의 순간순간을 함께 추억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내리는 별을 바라보며 우리는 끝을 맺었다. 커다란 실뭉치처럼 알찼던 우리, 그리고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그리움이라는 실오라기를 남기고서.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작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