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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May 11. 2023

어떤 시간  

[일기] 그리고 서울생활 (2)

오늘 아침 어떤 자매들의 카톡대화방에 그 중 한 멤버로부터 퇴사 기념 꽃바구니를 잘 수령하였다는 톡이 올라왔다. 분홍색 장미가 주를 이루는 분홍색 체크무늬 리본이 달린 꽃 바구니 사진과 함께 였다. 아래로 늘어진 리본에는 퇴사 이후 앞으로의 좋은 시간들을 응원한다는 카톡대화방 멤버 전원의 대표메시지가 궁서체 글자로 적혀있었다. 이 언니의 재직기간은 약 1년 가량이었다. 이 카톡대화방은 시민사회섹터에서 잔뼈 굵은 40대 언저리 언니들의 대화방이고, 자부컨대 이 바닥에서 소위 일잘러 중의 일잘러로 꼽히는 멤버들이 있는 방이다.(당연히 나를 포함! 우케케) 다만 이 언니들이 업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대체로 고된 과업에 차출되어 이용되면서도 시민사회섹터 내 혹은 사회적으로 위치를 재점유하지 못하는 까닭은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부족한, 직설적으로 말하면 라인을 탈 줄을 잘 모른다는 것(당연히 나를 포함)과 일과 생활을 균형감 있게 지속할 수 없는 불안정한 업무환경에 있을 거였다. (나의 경우, 소명의식의 상대적 낮음 또는 진정성 부족의 문제인가도 생각해보았지만 세상의 좋은 일도 진정성만으로 가능한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싶다) 시민사회섹터는 낮은 보수에 강한 소명의식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런 까닭에 정권교체에 따라 넓어진 정치,행정 등의 공공분야에 진입하여 소명과 밥벌이 사이에서 기묘한 줄타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언제나 예상 가능한 대형 외부변수에 모두는 직장을 잃고 마음의 상처인지 앞으로의 먹고사니즘에 대한 걱정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모두 속절없이 놓여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지난 3년여간 잊을만 하면 들려오는 퇴사소식에 무력하게 축하와 응원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나는 주류정치의 환경 변화 이전 내부 권력 싸움에서 더 큰 내상을 입고 대략 5년째 터널 속에 갇힌 기분으로 지내고 있으니 요즘 이런 소식에는 대체로 무덤해진 편이나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내가 터널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최근에는 내 앞으로 이 터널은 곧 끝날 예정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시간은 속절없이 보내야 한다는 명징한 사실과 함께. 침묵 속에 몸을 웅크리고 후두둑하고 쏟아질 것 같은 거친 말들을 앙다물고.


나는 이 시간이 5년이나 걸릴지 알지 못했다. 사실 터널 속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터널을 한 5미터쯤? 혹은 10미터쯤 앞에 두고야 터널이었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내상 이라기 보다 외상에 가까운 그 치명상을 입고 7개월을 쉬었고 1년 9개월 간은 사회적기업에서 잠깐의 조직생활을 했으며 2년여는 주변 지인들이 물어다주는 일감에 곤곤하게 밥벌이를 해왔다. 3년 전부터는 내가 있던 생태계에서의 사건에 대한 글쓰기를 시도했고, 처음에는 에세이를 고민하다가, 나의 일방의 이야기는 결국 허구이다(같은 맥락에서 어떤 다큐나 에세이도 결국 극과 소설이라는)라는 생각으로 소설쓰기(그건 어쩜 한 정치인이 말한 소설쓰고 있네와 같은 불순한 맥락이었을지도.. 지금은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로 전향해 작성된 그 글은 어떤 공모전에 내었다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당연한 실패에도 예상치 못했던 내상이 있었고, 8개월전 (그 곳의 배경과 몇가지 사건을 모티브로 스토리를 새로 만든) 다시 소설쓰기를 시도하여 현재 공모전 제출을 앞두고 지난번과 다르게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A4 3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출력본과 시놉시스와 신청서 등을 곱게 정돈해두고 나는 왜 망설이고 있을까를 고민하며, 한편으로 내심 후보작에라도 드는 걸 목표로 하면서다.  


이 고민은 책으로 출간이 되지 못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 글을 공개하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이제야 그런 각오가 선다. 어떤 시간을 속절 없이 보내고 난 뒤에야.


그리고,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애정하는 이들과 나란히 걸으며 그들의 시간을 응원한다기 보다 믿는다. 어쩌면 터널 안에서도 색이 죽지 않을 그녀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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