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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Jun 10. 2023

본캐로 살아보기    

[일기] 그리고 서울생활 (10)

순천이 좋은 건 끈적한 관계망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낯설고 부끄러움이 많은 이웃이다. 순천에서의 간헐적 살이를 막 시작할 때 숙소 앞 카페에 가서 말을 텄다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말들이 금새 내 반경 안으로 퍼지는 걸 알게 된 후 꼭 뜨거운 불에 댄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기도 했다. 그걸 또 어떻게 아셨는지 이 숙소를 관리하는 지역단체 사무국장님께서 "여긴 인사만 잘 하면 되요" 라고 넌지시 귀뜸해주셨음에도 좀처럼 말문이 트이질 않고 있었다. 사무국장님의 조언 이후 이웃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목인사라도 해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어쩌다 마주친 동네 어르신분들은 얼굴을 마주치면 따뜻하게 웃어주시기만 할 뿐 그러려니 하셨고(또 그게 감사했으며), 숙소 인근 근린시설의 사장님들에겐 왜인지 목인사가 아니라 너스레 좋게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해야할 것만 같아서 말문이 잘 트이지 않는 것이다. 일하는 땐 잘 나오는 너스레가 그곳에선 잘 나오지 않는 건 거기에선 일할 때의 부캐가 아니라 본캐로 살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그리고, 가끔 나 스스로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이 부캐에 대한 낯선 나의 감정이었음을 확인하며 잊고 있었던 나의 사랑스런 본캐를 조금씩 꺼내보고 있는 중이다. 하여간 다음번엔 목인사 말고 작은 목소리로라도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말을 건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서울로 돌아오면 다시 온통 부캐의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고 집에 오면 후회하는 일도 많아진다. 꼭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 같다. 보이지 않는 망 안에 내둥 걸려있다. 만나지 않아도 신경이 쓰이고 공과 사가 비효율적으로 뒤섞여 공사 모두에 유연해지고자 노력하며 서로에게 뭔가를 확인하기 위한 이해가 교차된다. 가끔은 이 모두가 섞인 관계도 있다. 엊그제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나와 같이 I형이 섞인 EF형(MBTI 외향/감정형) 사람에겐 강제적 고립의 시간이 필요하고, 순천이 나에게 그런 기능을 하는 일종의 유배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모든 시간과 관계가 피할 수 없게 연결된 현대사회에서 때때로 그 유배의 시간과 장소가 매우 절실해진다고도. 오랜만에 가진 뒷풀이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앞 상대가 (감사하게도) 얼른 자리를 접으려 하는 것 같았고, 실제 우리는 생맥주 한잔에 요기를 서둘러 하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헤어졌다.


참 기이하게도 비일상적인 장소인 순천에서 드디어 나의 본캐로 살아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때때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부캐도 필요한 것일테지만 본캐를 잃지 않고, 그곳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부캐와 본캐가 적절히 분리되고 그 모두를 부정하지 않고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울로 돌아온지 3일차만에 나는 다시 그곳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어쩌면 본캐인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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