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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Aug 17. 2023

청춘의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기] 간헐적 순천살이 (17)

엊그제 본가로 휴가를 왔다는 친구 P를 만나러 전주에 잠깐 다녀왔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순천에서 전주로 오갈 일이 제법 있었고 P와 연락이 닿았을 때 선뜻 내가 전주로 가겠다고 한 것도 다 이런 구력 때문이었다. 순천역에서 전주역까지는 무궁화호를 타면 대략 1시간 10분정도가 걸리고, KTX를 타도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꽤 먼 거리다. 나는 2량짜리 무궁화호를 대게 타는 편이고, 서울의 지하철이나 광역버스 보다는 매우 비싸지만 서울 강의 북쪽 지역에 위치한 우리집에서 용인의 언니네를 놀러가는 것 보다는 왜인지 심리적 피로감이 덜한데 그건 너무나도 명백하게도 공간도 시간도 텅 빈, 이 물리적 여유때문일거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이 열차만 타면 매번 여행가는 기분이 난다. 우린 이날 점심으로 그녀가 전주에 오면 꼭 먹는다는 콩국수를 먹었고 한옥마을을 걸어 그녀가 종종 간다는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몹시 무더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땀을 흘리며 전주천을 한참을 걸었다.     

교동찻집에서 바라본 하늘풍경/2량의 전주행 열차/교동찻집의 설기와 차

P는 내가 어느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사이로, 내가 처음 봤을 때 그는 카페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여러 지원기관들이 모여있는 단지 내 어느 청년지원기관에서 운영하는 카페 매니저였던 그를 나는, 꽤 인상 깊이 기억했고 나중에 P에게 이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그 카페는 다른 그것들과 달리 그곳만의 무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는 MBTI에서 E형인 나에게는 유독 응대가 없는 혹은 반응이 없는 편의 카페 매니저로 기억되었고, 얼마 뒤 카페 매니저가 바뀌어있을 때는 그가 어떤 연유로 일을 그만 둔 것일지에 대해 궁금해했던 것까지도 이상하게 기억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와 인연이 될 모양이었는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선배들이 막 만든 신생단체로 이직을 했을 때였다. 그는 역시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카페의 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곳은 내부사정까지 빤히 알아야할 만큼 내가 이직한 단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 뒤로도 그와 이렇게 가까워질 것이라곤 그다지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와  시기가 1년반쯤 되고 그 시기 살아온 이야기도 곧잘 나누며 특별한 계기 없이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진 사이다. P는 사회과학 학부생이던 대학 시절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쭉 지역과 서울의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해왔으며, 언젠가부터 커피에 관심이 생겨 카페 일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보다 전문적으로 커피와 그 산업에 대하여 알고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민사회영역을 떠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매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나는 그가 그곳에서 오래 못버티고 다시 시민사회영역으로 돌아오거나 그보다는 사실 자연스럽게 나와 멀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모두 빗나간 것이었는데, 그는 그 커피전문점에서 5번의 매장 이동을 하고 점장직으로 승진하기 까지 5년여를 버텼고, 일을 그만두고 갖가지 관련 자격증을 따며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던 2년여의 시간까지 합쳐 그 뒤로도 우린 7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일년에 두세번이나 볼까 말까 한 사이에다가 카톡으로 세심하게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는 아닌데다가 둘 사이 공통점이 키가 평균 이상으로 크다는 것 외 없다는 생각을 종종했지만, 우린 둘 만의 전주여행도 이번이 세번째 였고 그가 일하는 매장을 세 곳이나 찾아가 보았으며, 나는 그의 비밀연애담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 만났을 때서야 사실 처음으로 우리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창업을 고민 중인 그에게 약간의 스트레스가 엿보였고 고민하고 있던 창업아이템을 번뜩이는 눈으로 이야기했을 때는 긴 시간 어떤 일에 매진해온 그의 아이디어가 꽤 여물어졌다 생각하며 꽤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먼저랄 것 없이 이 새로운 도전에 성공해주기를 서로가 응원하는 마음까지도 닮았단 생각을 처음해본 것이다.   

 

그리고 좀 걷자는 나의 말에 바로 전주천으로 코스를 잡아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걸어주던 친구 P와, 무력하게 무더위를 원망하듯 이 맥락없이 세차게 더운 여름의 하늘을 찡그린 눈을 하고 자주 올려다보았고, 그러면 꼭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순천 저전동 골목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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