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여행과 독서, 공간과 머묾
책방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30년 전부터다. 초등학교 때 계몽사나 계림문고의 전집들을 지나, 중고등 학생 때는 범우 사르비아 문고의 단행본들에 빠져 있었다. 밤낮으로 소설책만 실컷 읽을 수 있다면! 하루는 E.L. 코닉스버그의 『클로디아의 비밀』을 읽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의 가출이라니. 전 세계 역사가 깃든 유물과 그림들을 보고, 이집트 여왕의 침대에서 잠을 자며, 견학하는 학생들 틈에 끼어 매일 새로운 배움을 탐구하다, 미스터리한 비밀에 근접해 가는 남매의 이야기. ‘집을 떠나’, ‘어딘가 매우 지적인 공간에 머물며’, ‘마법 같은 모험’을 하겠다는 결심은 나를 완벽히 사로잡았다.
다시 한번 뉴욕. 변화와 발전을 빠르게 주도하는 대도시 한가운데에서, 작은 ‘길모퉁이’ 서점을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이 있다. 도시의 정취와 삶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애정에서도 공통점을 확인하며 감정이 깊어진 익명의 채팅 상대와, 인터넷 메일이라는 ‘신문물’을 주고받으며 설레는 관계를 이어간다. 재벌이지만 인간미 넘치는 대형 서점 대표 톰 행크스에, 소박하고 진실한 동네 책방지기 멕 라이언까지. 두 사람의 알콩달콩 뻔한 사랑싸움은 당시 로맨틱 코미디의 진수였다. 뉴욕 여행에서 영화 속 카페 Lalo에 방문했을 땐, 현지인 마냥 투박한 뉴욕 스타일 초콜릿 케이크를 시키고는 관광객 티를 제대로 냈다. 스커트 정장에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고, 스타벅스 컵을 든 채 센트럴 파크를 걷는 모습이 뉴요커의 표상이 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영화 속 판타지와는 달리,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대공세 속에 도서정가제 동네책방이 살아남기 암담함을 깨달은 현실은 그보다 훨씬 훗날의 일이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 줄리아 로버츠라면?! 오랫동안 여행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핑계로, 『노팅힐』을 보며 여행전문서점을 운영하는 휴 그랜트 사장이 되는 꿈도 꾸었다. 런던 서북부 하이드파크 윗길을 산보하며, 여행이라 부르기 소박한 동네 풍경을 만끽했다. 이 정도 힙한 동네인데, 책 좀 안 팔린 들 무슨 대수냐고 호기롭게 외쳐 본다. 아래층은 책방, 위층은 살림집 형태로 꾸미면,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내 삶도 풍요로우리라. 현실과 동떨어지면 좀 어떤가, 할리우드 여배우와 동네 아재의 사랑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을.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만큼이나 성숙해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셰익스피어 & 컴퍼니’ 앞에서 재회하는 『비포 선셋』을 본다. 파리 한복판, 생 미셸 광장에 가서는 책방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매일 책을 읽고 타자기를 두드려 글을 쓰는 조건으로 무료 숙박했던 4만 명의 작가 지망생들. 집세를 내지 않는 책방 레지던스 시스템에 흥미가 생긴다. 뉴욕에서 실마리를 얻었고, 런던과 파리에서 구체화된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멀리하고 활자 대신 전자기기를 선택하는 요즘, 이북에도 밀려 중고생 학습서나마 치열하게 팔지 않으면 활로가 없는 동네책방들은 벼랑에 몰리는 느낌이다. 금전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소신을 가지고, 작고 외진 마을에서 책방을 운영해 나가는 에밀리 모티머의 『더 북샵』을 보았다. 그러나, 맞지 않는 수지타산과 주민들의 싸늘한 시선으로 인해, 영화 속 주인공임에도 좌절을 겪는다. ‘은퇴 후 책방을 하겠다’는 결심을 들으면 열에 아홉은 돈이 되겠냐는 반응이다. 수익 모델은 과연 어떻게 낼 것인가.
개브리엘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서는 가정식 서점의 형태, 출판사 직원과의 주문과 납품 관계, 저자 강연회를 비롯한 이벤트 등 책방의 실제 영업 이야기에 주목하였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딱 장편소설도 아니고, 딱 단편소설도 아닌’, 단편집처럼 서로 연결된 우리네 인생의 절묘한 조화에 경탄하였다. 이 모든 일은 책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인생의 실마리는 바로 책이다. 돈이 되든 말든.
『섬에 있는 서점』은 양평의 ‘산책하는 고래’에서 읽었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6월, ‘북스테이’ 여행에 한창 빠져 있을 때다. 북스테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조금 낯설다. 사실, 영어사전에도 정확한 해석이 없다. 우리말로 책머묾이라 하면 적당할까. 북카페보다 더 새로운 문화다. 책방에서 음료를 판매하며 간단한 모임이나 강연회를 위한 장소 대여, 독서 관련 문화 행사를 병행하는 일들은 원래부터 있어 왔지만, 같은 건물에 숙박 공간을 운영하며 책과 더불어 밤을 보내는 이색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에, 도서 판매로만 메꾸기 어려운 운영자의 수익을 도모하는 책방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속속 보인다. 주경야독이라 했던가. 책은 밤에 읽어야 제 맛임을 북스테이를 다니며 깨치게 되었다. ‘집을 떠나’, ‘어딘가 매우 지적인 공간에 머물며’, ‘마법 같은 모험’을 하는 경험은, 책과 더불어 밤을 지새우는 북스테이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책을 수북하게 쌓아 두면 오래도록 복을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壽福),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할(康寧) 것만 같다.
25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여생을 계획해야 한다. 파이어족이 되기엔 이미 너무 오래 직장인이었다. 이번 생에 건물주는 틀렸고, 고정 수입 없는 연금생활자로 살기엔 인생도 길고 아이도 어리다. 아래층에 책방을 열어 낮 시간에 책을 읽고, 중간층에 책을 좋아하는 손님을 캠핑처럼 머물게 하고, 위층에 사무실 겸 살림집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햇살 좋은 루프탑도 있으면 좋겠다. 여행과 독서라는 내 현업과 꿈을 만족시키는 곳이 되면 좋겠다. 부지를 알아보고, 건축을 세우고, 책을 선별하고, 손님을 맞기 전에! 우선 지난 2년간 내가 경험했던 북스테이를 풀어본다. 아직 열지도 않은 가게지만 손님맞이 사전 홍보다. ‘내가 사랑한 북스테이’는 그렇게 시작한다.
#0. 여행과 독서, 공간과 머묾
#1. 책의 향연 파주, 지지향과 모티프원
#2. 영추문 밖 예술가의 쉼터, 통의동 보안여관
#3. 속초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완벽한 날들
#4. 용문산 자락, 책 읽는 고래의 보금자리, 양평 산책하는 고래
#5. 고향집을 개조한 젊은이의 창공, 이천 오월의 푸른 하늘
#6. 딱 있을 것이 있는, 세종 단비책방
#7. 모든 것의 시작, 괴산 숲속 작은책방
#8. 색다른 머묾, 남이섬 정관루 & 북촌 정독도서관
##. 내가 사랑할 북스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