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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북강녕 Oct 24. 2021

내가 사랑한 북스테이 #1

#1. 책의 향연 파주, 지지향과 모티프원


파주에 출판단지가 조성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기획과 편집, 인쇄와 물류뿐 아니라 유통까지 이루어지는 출판업체들이 들어섰고, 영어마을과 아웃렛도 생겼다. 내가 일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던 2004년 즈음에는 헤이리 예술마을에 모인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갤러리와 주택을 꾸미고 작은 박물관이나 체험관을 만들고 있었다. 통일동산과 자동차극장, 반구정과 프로방스 중심이던 일산 너머의 여가가 풍성해진 것도 그 덕분이다. 


출판단지 안에는 책을 중심으로 한 복합문화공간 ‘지혜의 숲’이 있는데, 숲이라는 표현만큼이나 책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초대형 도서관을 품고 있고, 그 가운데 라이브러리스테이 ‘지지향(紙之香)’이 자리한다. 작은 동네책방 안에 한두 팀이 머물 만한 아늑한 공간을 지닌 여타 북스테이들과 달리, 지지향은 라이브러리스테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대규모다. 침구와 책상, 책장과 테이블로만 단출하게 꾸며진 객실에 들어서면, 마치 어느 기업의 교육연수원에라도 온 듯 진지한 기분이 든다. 책과 함께 머무는 곳인 만큼, 티브이는 없다. 객실마다 작은 서가를 만들어 몇 권의 책을 꽂아 두었을 뿐 아니라, 답답하지 않게 길고 트인 복도 곳곳에도 붙박이 책장들이 눈에 띈다. 지혜의 숲 1,2,3관 전체를 오가며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원하더라도 그 이상을 갖춘’ 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작가의 방’, ‘출판사의 방’도 갖추고 있으며, 세미나룸이나 다목적 대형 홀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과 함께 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할 수 있는 곳이다. 

지혜의 숲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6년,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라 생각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으로서, 물놀이장도 없고, 조식 뷔페도 없는 숙소에서 구성원 모두 만족감을 맛보기란 쉽지 않다. 책의 힘일까. 체크아웃 후에도 지혜의 숲에 내려가 각자가 원하는 책을 맘껏 읽었다. 나는 출판사 창비 코너에서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을 읽었다. 4.3 사건의 잔혹한 후일담을 절절히 그린 작품이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더 지지향을 방문했지만, 『순이삼촌』의 강렬한 기억은 아직까지 깊이 새겨져 있다. 

순이 삼촌


종이 향기 가득한 ‘지지향’을 지나 헤이리 예술마을로 들어가면 ‘모티프원’이 있다. 화이트, 블루, 우드, 미러, 블랙, 다섯 가지 색상 테마를 가진 스튜디오들은 예술마을답다는 탄성이 나올 만큼 멋스럽다. 객실의 천고는 높고 통창 밖 풍경은 한적하다. 샛노랑, 새파랑, 새빨강까지, 화려한 욕실의 타일이 선명해 눈이 시리다. 2020년 5월, 나와 아이는 스튜디오 블루에 묵었다. 방마다 좁고 긴 나무 책상이 있고, 무심한 듯 골라놓은 책들이 꽂혀 있다. 헤이리 촌장이자 모티프원 대표이신 이안수 작가님의 서재는 모든 투숙객들에게 밤새 열려 있는 공동 공간이다. 장백산맥의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커다란 수제 책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만 4천 권의 책이 꽂혔다는 서가가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티프원 스튜디오 블루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적한 풍경

배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 이안수 작가님의 첫인상은 예술가답고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이제는 헤이리에서 거꾸로 수많은 여행자를 맞이하신다는 소개가 의미 있었다. 자택에 거주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찾아온 손님을 맞고 지적 교류를 이어가는 삶의 모습이 새로웠다. 방문자들의 사연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로 남기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스위트 블랙을 제외하면 객실 내 주방을 따로 갖추지 않은 룸들이다 보니, 공동 서재 옆 주방에서 여행자들은 공간과 시간을 쉐어한다. 예술마을 깊숙한 모티프원을 찾아가는 길,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점 앞에 차가 멈추었다. 도착 표시는 점등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작가님께 전화를 걸었다. 


“은행나무하고 자작나무가 있는, 자갈길이 깔린 작은 숲길로 오세요. 집이 보일 거예요~!”


봄이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지 않았을 때였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아래서 자갈들이 뽀드득 소리를 냈다. 작은 숲 안에 위치한 모티프원에서의 하룻밤이 도심의 그것과 달랐던 것은 시작부터였고, 그 색다름은 1박 2일 내내 계속되었다. 이곳에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역시, 이 세상 소설이 아닌 느낌을 더했다.

댄스 댄스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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