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열매 #이지은 #사계절
‘아이 곰이 빨간 열매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기 곰은 노란 열매를 향해 또 올라갔을까?
’‘아기 곰은 실패한 걸까, 성공한 걸까?’
빨간 열매를 얻기 위해 무턱대고 나무를 오르는 아기 곰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용기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한창 젊었을 때는 나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했을 때 친구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유학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손에 든 잡지에 있던 캐릭터 학원의 광고를 보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내 인생이 바꾼 첫 빨간 열매였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는 좋아했지만, 누구나 다니던 미술학원 문턱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왜 하필 그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지의 광고를 본 순간 나의 어릴 적 꿈이 생각나 한시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캐릭터 학원에 다니게 되고, 원하는 캐릭터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캐릭터를 개발하고 상품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같이 학원에 다녔던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일본으로 일러스트페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캐릭터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가는 전시였고, 올빼미 여행으로 가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적었다. 도쿄의 빅사이트에서 열린 전시는 소문대로 어마어마했다. 하루를 돌아야 다 볼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양의 캐릭터와 굿즈가 있었고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전시를 보고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간다는 동네를 갔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기에 우리는 관광 책을 펼치며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대뜸 목적지를 내밀었다. 온몸으로 열심히 장소를 알려주던 일본인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직접 손을 잡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의 일본인의 친절에 반해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 년 동안 일본어를 배웠지만 실력은 늘지 않았고 떠날 날은 다가왔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빨간 열매를 얼른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2년 3개월의 일본 생활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원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좋은 추억만 떠오를 정도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숫기 없는 아이로 통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는 이유로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키우기 편한 아이였다. 그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으로 변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 어떤 빨간 열매를 만나서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해보고 싶은 건 못하고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쟤가 저렇게 변할 줄 몰랐다.”, “뭐 엄청 대단한 사람 될 줄 알았다.”, “언니만큼 하고 싶은 거 다 한 자식은 없다.” 등등의 말을 듣는다. 얼마 전 본 드라마에서 미래를 고민하는 딸에게 “마지막까지 가 본 사람만이 샛길로 샐 수 있는 거야.”라고 위로해 주는 엄마의 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나의 부모님도 늘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루라도 일찍 해. 그래야 조금이라도 우리가 널 도울 수 있어.”라며 든든한 응원을 해주었다. 이 말이 빨간 열매였던 것일까. 덕분에 ‘비록 실패하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구나.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뒤에서 기다려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큰 힘이 되어 버텨주고 있다. 나의 아이에게도 내가 받았던 넉넉한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아이와 함께 《빨간 열매》를 읽었다.
“아기 곰은 노란 열매를 찾으러 떠났을까?”
“아니, 실패했잖아. 그러니까 안 가지.”
마지막에 달을 보고 노란 열매의 맛을 궁금해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기 곰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실패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것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학교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빌려다 달라고 했다. 아이는 아침에 공부 준비해야 할 게 많다며 차일피일 미뤘다(언젠가 빌려올 테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책을 다 본 후, 아이는 나에게 “엄마한테 지금 빨간 열매는 뭐야?”라고 물었다. 나는 “너.”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힘이 되는 순간은 차곡차곡 쌓인 아이와 나의 시간이 만들어낸 사랑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마지막을 알 수 없어도 늘 힘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도 이 사랑이 빨간 열매를 찾아 나설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