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얄팍한 마음을 느끼며

13일차,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

by 걷는수달


오늘은 아마도 가장 걷기 괴로운 날이었다.

코스 자체의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다. 별로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약 23킬로의 길. 하지만 엊그제 양발에 처음으로 물집이 잡혔고, 시작부터 비가 내리면서 바람도 엄청 불었다. 코스의 길은 대부분 딱딱한 비포장 자갈길이나 포장길이었다.


아래 사진이 나는 아니지만 대략 이런 차림새와 풍경.



일단 비가 오니 판초가 번거롭다. 바람에 팔랑거리는게 거슬리고 틈새로 은근히 물이 조금씩은 스며들어 춥기도 하다. 온통 구름이랑 안개가 가득해서 풍경도 사라져버렸다. 빗속이라 폰 꺼내서 사진도 안찍게되고 고개를 들면 비를 맞으니 계속 바닥만 보면서 가야한다. 짜증나고 영 고역이다.


아 이런날은 그냥 버스를 타야 하는구나 왜 아침에 그냥 나왔을까 동키라도 보낼걸 비오는날은 걷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 바지랑 신발이 스멀스멀 젖어서 색이 진해지는게 보이는게 또 못마땅하다. 신발은 특히 너무 적시지 않고 싶다. 그래도 다행히 양말까지 축축한 느낌은 안드는게 신발의 고어텍스 표면이랑 울 양말이 신발속까지 물이 스며드는건 막아주고 있나보다.


그나마 오늘은 렌즈라도 썼으니 쫌 나은데, 어제는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코스에 불시의 비바람을 맞았을 때 안경을 낀 채로 있었더니 영화 기생충에서 이정은 배우가 연기한 집사가 폭우속에서 인터폰으로 애걸하던 것처럼 대단히 처량맞았었다.

그러면서 이 길을 편하려고 온건 아니지만 이정도 개고생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 왜 사서 이고생일까, 비오니까 경치도 없고 너무 싫으네 하면서 속으로 오만 불평불만이 가득하다. 택시타고싶다.


그러다가 또 잠깐 비가 그치고 구름사이로 파란빛이 조금만 보이면, 금새 다시 기분이 좋고 그래도 오늘도 걷길 잘 했네 싶어서 또 열심히 사진도 찍는다. 수레를 끌고 순례하는 스페인 노부부는 오늘도 저 멀리 보이셨는데 내 카메라(는 아니고 폰이지만)에 운치있게 포착되셨다.



이내 또 비가 온다. 속으로 마냥 툴툴대면서 질겅질겅 물집이 아픈걸 곱씹으며 걷는다. 또 그러다 반가운 바가 보이면 들어가서 따끈한 오믈렛에 마음이 또 조금 풀어진다.

오늘 여정 도중에 만난 가게는 알베르게도 운영하며 1층에서는 도네이션으로 바를 운영하는 작은 곳이었는데 음악도 좋고 아늑한 오두막 산장같은 기분이랄까. 느낌있고 오믈렛도 부드럽고 오렌지쥬스도 즉석에서 짜서 만들어주시고 고양이도 있고 좋았다.



결국 벨로라도까지 도착하는 내내 길은 풍경이 없는 차도 옆길이었으며 비도 그치치 않았다. 속으로 계속 욕하고 툴툴대면서, 빨리 끝내버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걸어제껴버렸다. 다이소에서 사온 2000원짜리 싸구려 판초는 그래도 나름의 방수가 되었고 어떻게 쓰는지도 조금 익숙해진거 같다.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도 참 얄팍한 마음은

걷고 있으면 쉬고 싶고,

쉬는 날에는 또 얼른 다시 걷고 싶고,

아침에 일찍 출발하고 싶지만 일찍 일어나는건 괴롭고,

그런데 일찍이 깜깜할 때 출발해서 날이 밝는 것을 보는건 좋고,

혼자 걸으면 좀 외롭고,

누군가 말 걸어주면 좋지만 막상 오래 이야기하는건 다소 부담되고,

매일 짐을 부치면 편하지만 등에 매고 걷는게 좀 더 멋진 것 같고,

껴입으면 덥고 벗으면 추운,

뭐 그런 참 사소하고 소심한 딜레마의 연속인것 같다.


9월 30일 금요일 벨로라도

오늘 걸은 길 약 23km

남은 길 약 5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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