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까지 같이 걸을까

15일차, 산후안데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

by 걷는수달


10월이 되니 해가 조금씩 늦게 뜨고 있다. 오늘도 아직 어둑어둑한 마을을 출발한다.


걷다가 마커스한테 문자가 왔다. (정확히는 왓츠앱이다)

헤이 킴 아헤스 오고 있니? 나 15분 쯤 있다가 출발하려고.

응 나 가고 있긴 한데 너 출발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것 같아 길이나 바에서 보자구.

괜찮아 얼마 안걸릴테니 기다려 볼게.

오 꼭 기다리지는 않아도 되지만 나 여기 언덕에서 저기 아헤스 보이는거 같아.


어제 일찌감치 도착한 피자바에서 신나게 피맥을 할 때 얼마 후 도착한 마커스는 나랑 맥주 한잔을 하고 조금 더 걸어 4~5km 떨어진 다음 마을인 아헤스Ages까지 갔었다. 이 친구는 로그로뇨 전후로 만나게 되었는데 나이도 비슷하고 여정의 템포도 비슷하여 자주 마주치며 같이 걷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아헤스에서 만나 하루 종일 같이 걸어 다음 목적지인 대도시 부르고스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마커스는 독일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살고 있고, 카미노 여정 내내 매일매일 아내에게 엽서를 써서 부치는 낭만적인 친구다. 같이 걸으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케빈코스트너가 나오는 늑대와춤을 그리고 옛날 흑백영화 올리버트위스트라고 한다. 나는 시네마천국이랑 비교적 요즘(이라고 하기에도 꽤 되었지만) 영화로는 그래비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알폰소 쿠아론의 최근작 로마도 좋아한다고 하네. 나는 로마는 흑백이라 한 5분 보다 포기했지만 돌아가면 꼭 보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서유럽권이 지원을 열심히 하는데 다 경제적인 이유때문이라든지 뭐 그런저런 여러가지 얘기를 영어로, 서로 완전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눈치로 알아들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네이티브가 아니라 오고 가는 대화 리듬이 괜찮다. (아니면 나를 위해 천천히 이야기하며 배려해준지도?) 한편 말이 빠르고 유려한 미국인들을 만나면 대화 핑퐁이 아주 벅차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얘기하다보면 은근히 삶의 공감대가 비슷하고, 서로 공유하는 대중문화 같은것도 꽤 비슷하다. 생김새도 대륙도 서로 무지하게 다른 것 같지만 사람 사는게 어디나 참 비스무리 하구나 하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순례길에서는, 모두가 오늘 하루 건강히 잘 걸어가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좋은 숙소와 맛있는 식당을 찾는 등 라이프스타일(?)이 굉장히 비슷해지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온 다른 사람들과도 쉽게 공감대를 가지며 여러가지를 공유하게 되는게 정겹다.


부르고스로 진입하는 도시 초입이자 변두리엔 슬럼가랄까 창고지대같은 곳이 이어졌다. 길을 살짝 잘못들었는지 진짜 현지 분들만 계시는 바에서 맥주도 한잔 하고, 황량한 도시 초입의 쓸쓸한 길을 걷다가 현대음률 아니 현대문명의 상징 맥도날드님을 발견해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먹었다. 교양있는 도시인들이 계시는 맥도날드에서 약간 거지차림에 땀내가 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지만 썬대 아이스크림은 꿀맛이다.



부르고스에 접어들면서 문득 음악 얘기가 나왔다. 마커스는 고향 친구들이랑 오래전부터 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뭐 여느 취미밴드가 그렇듯 요즘은 다들 도망가고 자신과 또한명의 친구만 근근히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자기가 리더고 밴드를 계속 하고 싶은데 쉽지는 않단다.

어너두? 나도 꽤 오랬동안 밴드를 했었는데. 근데 나는 리더는 아니고 도망친 사람이야. 우리 팀에도 리더이자 늘 밴드에 대한 갈망이 있는 형님이 계시지만 나는 왠지 흥미를 잃은지 오래지. 마커스도 살짝 짠하고 한국에 계시는 뺀드 리더 마르스 형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그러고보니 누구랑 하루 전체를 같이 걷는 건 처음이었네. 물집이 좀 아프고 다리가 뻐근하지만 같이 걸으니 또 걸을만 하군.


10월 2일 일요일 부르고스

오늘 걸은 길 약 30km

지금까지 걸은 길 약 300km

산티아고까지 약 490km



PS. 알고보니 오늘 오면서 먹은 야채 가득한 또르띠야가 순례길 최고의 또르띠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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