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는 카미노 프랑스길에서 팜플로냐, 로그로뇨에 이어 세번째 만나게 되는 대도시다. 대도시라고는 하지만 카미노의 작은 마을을 다니는 순례자의 눈으로 봐서 그렇다고 할 수 있고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같이 거대한 도시는 아니다. 인구는 약 17만 정도. (경기도 안성시가 약 19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네스코 유산인 굉장한 성당과 넓고 네모진 멋진 광장이 있고, 순례자와 현지인 관광객 등이 적당히 조화롭게 어우러진 근사한 도시다.
산티아고 길의 중요한 도시인 만큼 지나가다보면 순례자를 형상화한 입간판같은 전시물이 길에 자주 눈에 띈다. 순례자가 지나가야 하는 카미노 경로 상에 놓여있어 복잡한 도시에서 노랑 화살표를 대신하기도 한다. 보면 제각각의 아이디어가 재미있기도 하고 순례자로서 반갑기도 하다.
대성당 뒷편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성채가 나온다. 여기서는 도시 전체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시간이 살짝 늦어서 성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도시의 오밀조밀한 건물들과 도시 주변의 평원까지 둘러 볼 수 있다. 동쪽으로 저어어 멀리 지평선 부근의 언덕은 어제 걸어온 곳이고, 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벌판은 내일 걸어갈 곳이다. 와 이렇게 보니 대단히도 걸어오긴 했다. 사진에는 그 멀리의 감흥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울 뿐.
대도시이자 관광지답게 기념품 가게도 많이 있다. 기념품 가게는 종종 보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되도록 아무것도 사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만 눈에 들어와버린 심슨 순례자 마그넷!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두개 사서 한국 돌아가면 우박사에게 주려고 했으나 물어보니 여기 진열된 물건이 마지막 남은 하나라고 한다. 역시나 다들 심슨을 탐내고 있었군. 솔직히 말하면 심슨은 가끔 짤로나 익숙할 뿐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적은 없다. 그래도 호머 심슨이 지팡이 짚고 걸어가는건 참을 수 없지.
부르고스에서는 음식도 맛있었는데, 다소 재미있는 조합의 아시아 음식점도 있고 꽤 괜찮은 타파스 바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도 했다. 숙소 바로 앞에 있길래 찾아갔었던 TORA라는 식당은 아시아 스트리트 푸드바를 지향한다는데 퓨전 한식 일식 중식을 모두 판다. 마끼에 스윗칠리소스가 올라가 있는 등 대단히 근본이 없지만 나름 신선한건가..(?!) 뭐 간만에 아시아 풍미를 느낀다는데 의의를 두자.
타파스는 굉장히 캐주얼하고 경계가 없는 음식인지, 이제 아시아 스타일도 많이 시도하고 있나보다. 첫 날 여럿이서 간 타파스 바에서는 이것저것 대여섯 종류가 나오는 타파스 세트를 시킬 수 있었다. 주문해보니 세트의 구성에는 감차튀김이나 나초같은 비교적 무난한 메뉴와 더불어 참치 타다키도 있었고 야끼소바도 있었다. 타다키는 과일소스가 곁들여 나오는데 의외로 상당히 잘 어울렸다. 타파스 세트는 한국으로 치면 모둠안주를 시키고 술한잔 하는 것과 비슷하여 새롭고도 익숙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여기서의 베스트는 둘째날 먹은 바로 요 홍합 타파스. 몇가지 종류의 홍합 타파스를 판다. 대표 메뉴인지 카운터에 사진으로 크게 붙어있는 빨강 홍합, 야채 홍합 타파스를 한접시씩 시켰다. (물론 그 외 다른 것들도 시켰다) 홍합을 손으로 잡고 쏙 빨아먹으니 나름 즐겁다. 특히 빨간양념 홍합은 대단히 한국적인 맛이 난다. 뭐라고 해야할까 아주 라이트한 해물찜이랄까 떡볶이소스 느낌? 이거 예상치 못했는데 갑자기 살짝 고향의 맛이 심금을 울리네.
로그로뇨에서 너무 맛있게 먹었던 감자 타파스 빠따따 브라바스도 메뉴에 있길래 한번 같이 시켜봤는데 거기엔 한참 못미치는 맛이었다. 이집은 역시 홍합맛집이었군. 가게 이름마저도 La Mejillonera 인데 번역기를 돌려보니 홍합이 mejillon이니까 홍합집 내지는 홍합농장 또는 홍합나라 같은 느낌인가보다.
하루를 쉬어가는건 약 1주일 전쯤 로그로뇨에 이어 처음이었다. 고져스한 홍합 타파스를 먹고 마커스랑 각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좀 아쉬워서 길가에 보이는 맥주바에서 딱 한잔만 더하기로 했다. 여기서는 오하라스라는 빨강 맥주를 시킬 수 있었는데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스페인은 와인도 좋지만 맥주도 대부분 훌륭한데 오하라스는 지금까지 먹은 순례길 맥주 중 최고라고 할 만 하다. (아쉽게도 이후로 이 맥주는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어둡고 한가해진 도심의 노상 바에서 무이비엥한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있는데 누군가 슬쩍 말을 걸어 온다. 모르는 얼굴. 이야기를 들어보니 카미노 걷고있냐고, 자기도 내일부터 부르고스에서 시작해 순례를 시작할 순례객이라고 반갑다고 한다. 맨날 입는 추레한 평상복에 슬리퍼 차림인 우리의 행색은 이제 누가 봐도 산티아고길 걷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로군. 자연스럽게 합석해서 같이 맥주 한잔을 했다.
그는 영국 요크에서 온 배리 아저씨. 이번이 두번째 순례길이라고 한다. 지난번에는 생장에서 시작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부르고스에서 포기하고 돌아갔었고 이번에 다시 이어서 걷는다고 한다. 다리가 아팠던 원인은 허탈하게도 신발끈을 너무 꽉 맸던 거라고. 이번에도 끝까지 갈 일정은 안되고 레온까지 가신다고 한다.
나는 조각조각 나누어 걸어서 너희들처럼 쭉 걸으면서 얻는 감흥도 없고 친구도 못사귈거야. 맥주도 한잔 했겠다 내 리스닝 능력은 매우 떨어졌지만 (뭐 그렇다고 평소에도 훌륭한건 아니다) 대충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배리 아저씨는 미소를 띈 채 영국식 발음으로 시니컬하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본토 영국인의 시크한 감성인가.
언젠가부터 산티아고까지 완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산티아고에 무사히 걸어서 도착하는게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혹시 완주하게 된다면 감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쌀쌀해진 부르고스의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