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를 지나면 이제 악명 높은 메세타고원 지역이다. 메세타meseta가 스페인어로 고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딱히 반갑지 않고 길찾기도 좀 어려운 도시의 외곽을 지나면 이제 별 경치도 없고 황량한 벌판이 가득 펼쳐진다. 중간에 만난 작은 예배당에서 수녀님의 축원을 받은게 작은 위로라면 위로랄까.
순례길 중간 중간에는 작은 예배당들이 많이 있다. 문을 닫아 놓은 곳도 많고 열려있는 곳도 많다. 그런 곳을 만날때면 비록 종교가 있지는 않지만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이 길을 무사히 걷기를, 한국에 계신 엄마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엄마의 몸이 안정을 찾기를. 수녀님은 알 수 없는 스페인말로 기도를 해 주시고 작은 목걸이도 하나 주셨다.
메세타 고원은 스페인 이베리아반도 한복판에 있는 고원으로, 우리가 걷는 길은 해발 7~800미터 정도를 유지한다. 그야말로 황량하고 광활한 곳. 많은 부분은 밀밭인것 같지만 수확이 끝나 생명감은 찾아볼 수 없고, 길도 무지무지 건조해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작은 돌멩이가 가득해 미끄럽다.
코스의 높낮이는 단조롭고 어렵다고 할 수는 없는데 땡볕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고 그 적막감과 황폐한 압도감이 발길을 무겁게 하는 곳이다. 비가 좀 오는게 오히려 나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그래서 의외로 음악 듣기에는 과히 최적의 코스가 된 것 같은데,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 바로 뮤직비디오가 된다. 뜻밖에도 온갖 종류의 장르가 다 잘 어울린다.
내가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god 길)
내가 만든 쿠키 디저트는 없어 식사도 없어 (뉴진스 쿠키)
그 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사랑을 두고 오자 (최백호 바다끝)
끝이 보이지 않아 출구가 있긴 할까 발이 떼지지 않아 (BTS Life goes on)
아니쥬루 스테이 니쥬루 스테이 에 (저스틴 비버 Stay)
셉템버몬 위 댄스틸너나잇비케임어 브랜뉴데이 (닐 다이아몬드 September Morn)
더 롱 앤 와인딩 뤄~ (조지 벤슨 The long and winding road)
기다려 기어이 우리가 만나면 시간의 테두리 바깥에서 (아이유 시간의 바깥)
나만 찌질한 인 간 인 가 봐 (과나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 봐)
아름다운만큼 짧았던 그날처럼 (페퍼톤스, 노래는 별빛처럼 달린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 아, 아니 셀프 뮤직비디오를 들으며 걷고 나니 오늘의 목적지인 산볼 알베르게가 보였다. 여기는 마을은 아니고 황량한 길 한가운데 알베르게만 있는 곳이다. 벌판 한가운데이니 주변에는 식당이나 다른 시설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경험하고픈 사람들에게 또는 황야의 한 가운데서 순례길의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름 인기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도착해 물어보니 다행이도 오늘은 자리가 있다고 한다.
얼른 슬리퍼로 갈아신고 신발을 벗어 햇볕에 말려두었다. 배낭도 잠시 땡볕에 놓아두었다. 발목이며 종아리는 뻐근하고 발바닥은 물집으로 쓰라리다.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어 와이파이도 안되고 마당에 탁자 하나가 전부인 이곳에서 잠시 맥주 한잔을 시켜 먹으며 (그래도 맥주랑 콜라는 판다) 한숨 돌렸다.
체크인하러 들어갔더니 안쪽에는 큰 창이 나있는데, 벌판 전망이 기막히게 보이는 액자다. (사진처럼 내부가 어둡지는 않다)
넓은 마당에는 물을 받아놓은 풀이 하나 있고 거기서 빨래를 할수 있지만...
그냥 대강 헹궈서 말리기로 했다.
침대는 2층이 만약 부서지면 바로 황천길 갈 것같이 살벌하고
진정 하염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다.
주변에 밥먹을 곳이나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으므로 저녁은 숙소에서 먹는 선택지밖에 없다. 숙소 내부의 동그란 큰 식탁에 둘러앉아 다같이 먹는데, 호스트가 직접 요리를 해주신다. 엄청 큰 빠에야팬에 약 10인분 이상의 빠에야를 한가득 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
호스트는 쿠바에서 오셨다고 한다. 밥을 먹은 후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신다며 무려 두곡이나 노래를 불러주셨다. 공간의 특징인지 발성이 좋으신지 엄청 쩌렁쩌렁한 성량. 알고보니 음반도 내셨고, 운영을 위한 도네이션의 목적으로 씨디도 판다고 한다.
어제밤 부르고스에서 인사했던 시크한 영국남자 배리아저씨도 여기서 머물렀는데, 나중에 쿠바주인장 가고 나서는 결국 씨디 팔려고 노래했구만 노래도 별로던데 어떻게 생각해 하면서 역시 시니컬하게 반응했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 그냥 도네이션함에 남는 동전을 몇개 넣었다.
한 8시쯤 되자 이제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당에 낮은 담장에 앉아 천천히 밤이 되고 별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어스름이 시작된다. 햇빛의 조각이 사라지고 별들이 많아지는걸 기다리는 건 참 생소하고도 여유롭고 조금 더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아쉽게도, 달빛이 생각보다 밝아서 기대했던 만큼 쏟아지는 별은 아니었지만...
다음날 아침, 동트기 전 일찍 출발한 까만 하늘에는 달이 저편으로 사라진 자리에 무수한 별들이 있었다. 소리마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이 별빛만 가득한 새벽의 벌판을 홀로 걷는 적막감과 고독감 한편으로는 무섭고 설레이는 감정은, 카미노 최고의 아침길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