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길이 훤하다는게 진짜 길일 줄이야

18일차, 산볼에서 보아디야델카미노

by 걷는수달


그날은 멋진 초원의 별빛 가득한 하늘과 맛있는 햄버거와 함께 평화롭게 시작되었다.


이세상 같지 않은 까만 하늘과 사방의 지평선. 어제 머문 산볼 알베르게가 있는 황야 한복판에서 출발해 세시간 쯤 걸었을까,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초원 한가운데 언덕에 자리한 예쁜 마을이다. 마을 이름도 좀 어려운게 고급진 느낌이 난다.


마을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저 앞 식당 옆에 길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던 제주도 부부가 보여 반갑게 인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시는 길이란다. 이집에서 햄버거도 팔고 맛있어요. 오 그래요? 아직 점심은 아니지만 번듯한 식사를 주는 바를 놓칠 수 없지. 당장 들어가 맛있고 양도 많은 햄버거를 잔뜩 먹고 나왔다.


나와서 한 5분쯤 걸었나. 라면과 비빔밥을 판다는 한글 간판이 등장했다. 응? 메세타 한가운데 갑자기?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자 알베르게라는데 세상에 라면에 김치도 먹을수 있단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방금 햄버거를 배부르게 먹고 나온 길인데. 순간 내적 갈등이 폭발했다.


햄버거가 사실 더 영양적으로 좋고 재료도 비싼 음식이지만 한식은 못참는데 라면만이라도 먹을까도 싶지만 그랬다간 과식으로 오늘 더는 못걸을 것 같고 아 햄버거가 너무 튼실했어 제주도 부부가 햄버거를 알려준건 고맙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커피에 빵쪼가리나 먹고 나왔겠지 그리고서 이 간판을 봤더라면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행복하게 비빔밥을 먹을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지만 과감히 포기하고 갈길을 떠났다.



햄버거는 주문하고 먹는데 시간도 꽤 오래걸렸다. 다시 출발하는 시간은 거의 오전 11시가 다 되었다. 오늘은 꽤 많이 걸어야 해서 아직 갈길이 한참 남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카미노 길에서 오전 시간은 꽤 소중해서, 열심히 진도(?)를 좀 빼줘야 이후가 편하다. 12시가 넘어가면 체력도 좀 떨어질뿐더러 상당히 날씨도 뜨거워져서 걷는 속도가 확 느려진다. 더불어 배도 고파져서 간단히든 제대로든 점심 요기를 해야해서 12시 이후의 시간대비 거리 효율은 오전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시 전에 전체 거리의 80프로정도는 걸어줘야 마음이 놓이곤 하는데 오늘은 겨우 절반 조금 지난 것 같으니 이미 좀 불길하다.


그나마 높낮이 자체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는 길이 내내 땡볕에 허허벌판이어서 정신적 데미지가 좀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물집이 엄청 잡혀있었다.


물집은 나름 관리한다고 했는데 물집패드를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걸으면서 알았다. 물집패드는 물집을 사라지게하는 물건이 아니었고, 물집 극 초기에 (사실상 물집이 아직 없는 시점) 미리 그 부위를 보호해서 물집을 예방하는 용도였던 것이었다.


며칠전 난 작은 몇몇 물집 위에 물집패드를 정성껏 발라줬는데 물집패드는 물집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안쪽에서 물집을 키워갔고, 이제 한창 물오른 제철 물집은 걸을때마다 무지하게 아파졌던 것이다. 그와중에 땡볕의 벌판을 아직도 17킬로쯤 가야한다니...



설상가상으로 꽤 높은 언덕을 지나와야 했다. 이 언덕은 고난의 언덕이라 불러도 될것 같았다. 뙤양볕의 언덕을 대각선으로 뻘뻘 오르니 아까 햄버거를 먹었던 마을부터 여기까지 온 길이 고스란히 보인다. 정말 엄청난 평원과 벌판이네. 오르니 경관은 굉장하다. 언덕 꼭대기에 작은 쉼터가 하나 있는데 거기 나무지붕 아래에서 여길 먼저 거쳐간 카미노 선배님들이 적어놓은 고난의 역사를 잠깐 읽을 수 있었다.



도화님은 뭐하시는 분이시길래 여기를 8번이나 오셨을까. 나도 진심으로 막국수가 먹고 싶다.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자아를 찾고 싶지는 않은데. 발꿈치부근의 물집은 너무 아프네.


자 여태 언덕을 올랐으니 이제 내려가야 하는데 이 허허벌판에서는 내앞에 걸어가야 할 고생길이 또 훤히 보였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이 보이는건 좋은걸까 안좋은걸까.



끝없는 길은 땡볕에 먼지가 자욱하다. 딛을때마다 욱신거리는 발을 부여안고 꾸역꾸역 걸어간다. 황야에 지평선으로 걸어가야 할 끝없는 길이 보이니 멘탈이 살살 녹아내린다. 차라리 모르는게 나았을 것을. 아니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는게 비유적인게 아니라 이렇게 물리적인거였어?


여정의 막판에는 똑같이 고생하면서 어그적 어그적 걷는 순례객이 보였다.

헤이 부엔카미노! 너도 발 아프구나 나는 물집이 너무 아파. 나는 킴이야.

나는 펠릭스야. 나도 물집을 안터뜨려서 너무 아파 죽겠어.

비슷한 고통의 시간대를 걷는 친구가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오늘밤엔 물집을 꼭 빼자 하면서 너덜너덜한 상태로 길을 끝내니 5시가 다 되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0시간이 걸렸다. 약간 얼이 빠진 것 같다.


도착한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 앞에 오니 마커스가 숙소 앞 마당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있다. 고생 끝에 또 만나니 반갑네 그려. 얼른 체크인을 한 뒤 앉으면 머리가 닿는 도미토리 2층 침대의 1층에 쭈구려서는 바늘로 연신 물집을 빼냈다. 이제 물집패드는 버려야지. 역시 문제는 덮어두면 안되고 다소 따끔하더라도 커지기 전에 터뜨려야 하는 것인가.


그동안 걸은 길중 가장 길고 힘든 하루였다.


10월 5일 수요일 보아디야델카미노

오늘 걸은 길 약 34km

남은 길 약 4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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