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황량한 메세타 고원의 중간이자 프랑스길의 중간지점을 넘는 날이다. 오늘 걷는 길은 약 17km 동안 거의 지평선만 있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허허벌판이라는데, 그 벌판 중간의 어디쯤이 프랑스길 800km의 딱 중앙 지점이 된다.
가장 고독하고 긴 길과 그곳에서 맞이하는 후반으로의 전환점. 뭔가 중년으로 가는 인생과 비슷하고 마셔보기는 커녕 본적도 없는 도라지 위스키처럼 낭만적이지 않은가? 왠지 모를 로망에 이 고독하고 멋진 길을 동키로 짐을 보내지 않고 배낭을 짊어지고 가고 싶었던 나는, 엊그제부터 왼쪽 발목이 안좋은게 계속 뻐근함에도 불구하고 여느 날의 순례자처럼 그렇게 산타마리아 알베르게 부엌에서 아침밥을 먹고있는 동료 순례자들에게 쾌활하게 부엥카미노를 외치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채 까리온 마을을 다 빠져나오기도 전에 동키(짐 배달 서비스)를 쓰지 않은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거 안되겠는데. 생각보다 더 안걸어지네.
사람의 생각이란게, 특히 과거에 대한 미련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마련이다.
발 관리 체력 관리 꽤 잘해왔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에스떼야 로그로뇨까지 물집조차 없이 명랑했는데 그 뒤에 어디쯤부터 매니징에 문제가 생긴걸까?
애초에 오늘은 까리온에서 하루 쉬거나 최소한 짐이라도 부치는게 맞았는데, 늘 욕심은 이성을 앞서고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의 목표지점은 공포의 황무지만 지나면 바로 도착하니 평소보다 꽤나 짧고 평소같으면 12시 전에 완료할 널널한 길이다.
그런 맘으로 최대한 다리에 부하가 안가게 천천히 살살 걷고 있다보니 또 문득 생각이 든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스스로의 소중한 규칙 같은 것을 만들어서 굳세게 지키려고 하고 있었네. 버스를 타지 않는다든지, 짐은 웬만하면 지고 걷는다든지, 꼭 반드시 완주한다든지, 여기서 만난 친구들하고 페이스를 맞춰 걷는다든지 등등.
어떻게 보면 그런거 안하려고 온건데, 왜 여기까지와서도 목표와 룰에 집착할까. 뭐 또 한편으로는 그런거 좀 집착하면 어때 밑져야 버스 타든지 카미노 포기하고 비행날짜까지 유럽 여행이나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혼자 과거와 미래를 곱씹고 있는 내가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 오늘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이왕 배낭 매고 나온거, 발목 좀 아프다고 인생에 큰 탈 안난다는 생각으로, 여러가지 ㅈ도신경 안쓰는 벌꿀오소리처럼 그냥 되든 안되든 걸어보기로 했다. 걷다보니 영 느려서 뒤에 사람들이 계속 나를 앞질러 지나갔지만 난 어차피 오늘 17키로만 걸으면 끝이고 끝없는 황무지가 지옥의 코스인들 최근 몇 년의 내 인생보다 더 빡셀건 아니잖아?
중간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꽤 근사한 콘레체를 시키고, 한국의 우박사와 통화하며 괜찮은 척도 하면서 황무지 구간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렇게 엉기적 슬금슬금 걸어간 마의 황무지는 소문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엊그제의 그 곳이 더 황량하고 무더웠으며, 오늘은 주로 아침녘에 걸어선가 마음의 준비를 해선가 사뭇 유쾌하게 지날 만 했다.
황무지라고 들었지만 좌우로 끝없이 넓은 밀밭과 시원한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오줌눌 데도 없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작은 수풀이 있어서 급할때는 하이드 인 부쉬 하면 된다.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 쓸쓸하지도 않다.
끝없는 직선길을 한참 어기적대면서 가는데 오늘도 마커스가 지팡이를 짚고 (등산 스틱이 아니라 순례자 관광굿즈같은 커다란 나무 지팡이다. 길 초반에 주워서 계속 쓰고 있다고 한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나 여느날처럼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 친구는 슬쩍 우울할 만 하면 갑자기 나타나서는 멘탈 게이지를 돌봐준다. 한동안 맞추어 걷다가 수풀 화장실도 갈겸 마커스는 먼저 보내고 곧 따라간다고 하고 조금 더 천천히 마저 걸었다.
다음 마을은 의외로 성큼 다가왔고, 거기서 먼저 도착해 쉬고있던 마커스와 제니를 다시 만나 꽤 괜찮은 쿠스쿠스도 먹고 이태리 국민음료 (스피리추얼?이던가)도 시원하게 한잔 했다. 체크인한 작은 숙소에서는 대구에서 오신 유쾌한 남매분들을 처음 만났는데 깔리모쵸(와인에 콜라를 탄 칵테일)를 마시면서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다.
이정도면 어쩌면 꽤 괜찮은 후반으로의 전환점일수도 있지만 내일 아침 발목 상태를 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