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보에 비가 온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깥에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가 심상치가 않았다. 왼쪽 발목은 좀 부었고 최근 이삼일은 걸을때마다 자주 종아리랑 같이 땡기는 느낌이 많이 든다. 파스도 붙이고 테이핑도 하고 근육 크림도 바르고 동키도 보내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염제도 먹고 할수 있는건 다 했지만, 욕심껏 걷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날씨도 쌀쌀하다.
지루하고 평탄한 이 메세타 지역을 한 5일, 늦어도 6일 정도에는 주파하는게 목표였는데 이미 오늘로 5일째. 왠지 조바심이 나고 다리는 어제나 그제보다는 아주 조금 나은 것도 같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내일하고 모레까지 이틀을 더 걸으면 7일째로 레온에 도착할 수는 있을텐데 그렇게 계속 걸으면 다리가 나을 것 같지가 않다. 근육 피로누적이란게 이런거구나.
게다가 밤에 숙소 잠자리도 좀 불편했어서 잠도 푹 못잤고 아침에 사람들이 열심히 짐싸서 출발하는데 영 빠릿빠릿 움직일 마음이 안든다.
아몰랑 그냥 되는대로 해야겠다. 어떻게 하고싶은 대로 계획대로 다 하고 사냐. 맞춰서 사는거지. 이왕 틀어진거 출발도 늦게 하고, 오늘은 그냥 마냥 천천히 걸어야지. 혹시나 걷다가 비가 많이 오면 사하군까지 버스를 타버려야지. 이왕 버스타고 점프할꺼면 레온이 낫지만 이미 아침에 배낭을 사하군으로 보내버렸군!
을씨년스런 아침 날씨에 영 발이 떼지지 않는다. 느릿느릿 짐을 싸고 다들 출발하고 몇명 남아있지도 않은 숙소 1층 자판기에서 맛없는 참치 샐러드를 뽑아먹으며 (4유로나 하는데 그냥 야채참치맛이다) 게으름을 피웠다.
그렇게 늦장 끝에 출발했다. 에라 물도 중간에 대충 사먹을 생각으로 최소한으로만 챙기고 짐도 미리 보냈겠다 간편 배낭만 달랑 매고 한량 마냥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배낭을 보냈어도 여전히 느려진 걸음에 속도는 안나고 날씨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그렇게 한시간 쯤 빗방울을 간간히 맞으며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저 앞에 무지개가 슬며시 보였다.
여전히 비는 좀 내렸지만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갈수록 구름이 조금씩 멀어졌다.
하늘은 조금씩 밝아져갔고 무지개는 더 선명해졌다.
길의 모양이 변하면서 나무에 가려진 곳도 없이 정면에 넓은 지평선이 펼쳐졌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지평선 위의 완전한 반원의 무지개였다.
오마이
지구는 정말 둥글군!
무지개는 레알 빨주노초파남보 일곱빛깔 색이군!!
이번주 메세타 길은 너무 힘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최고의 순간도 함께였다. 산볼에서 출발한 별이 가득한 까만 밤하늘도 광야 한가운데 지구인지 화성 어딘가인 싶은 황량한 풍경도 최고였고, 지금 본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완벽한 반원의 무지개도 그랬다.
최악의 시기에 최고의 순간들을 맞이하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인생이 원래 그런건가?
한편으로는 힘든 길, 부상과 물집, 예측불가한 상황, 순간의 풍경, 좋은 사람들 등 여러가지 상황들이 펼쳐지다 보니 여러모로 복잡하고 피로한 감정도 몰려왔다. 단순하려고 이 길을 떠나왔는데 왜 이러는거니.
문득 이정도면 됐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도 회복할 겸 이 황무지를 떠날 때가 된것 같다.
다음 대도시인 레온까지는 겨우 60키로 남짓 남았지만 고작 그 거리를 그냥 넘겨야 할것 같다. 나중에 800키로 중 60키로를 안걸었다는 아쉬움이 많이 들것 같기는 하다. 한번 점프하기 시작하면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딱 이정도면 된 것 같았다. 남은 길을 걸어가기 위해 지금은 살짝 비워야 할것 같았다. (이건 뭐랄까 왠지 지금 내가 딱 인생에서 마주한 지점 같기도 한게 묘한 감흥이다)
그렇게 중간에 잠시 쉬러 멈춘 바에서 메세타와 헤어질 결심을 굳히고, 마침 오전에 나를 지나쳤던 순례자와 개도 마주쳤다. 반려견인줄 알았는데 물어보니 자기 개가 아니라 어제부터 따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 또 만나서 근황을 물었더니, 주인을 수소문해 찾았는데 개가 매우 불행한 몸짓으로 돌아갔다고)
짐을 보내놔서 어쨌든 사하군까지는 가야 한다. 문득 한국에 있는 친구 람군 생각이 나서 전화도 한통 걸었다. 이놈의 황무지는 영상통화도 잘 안된다. 음성통화로 바꾸어 떠들고 투정도 좀 부리고 나서 다시 오늘의 남은 길을 출발했다. 그래도 발걸음이 꽤나 가벼워졌다. 뇌도 약간 가벼워진 것 같다.
눈앞에 멈춘 바에서 아직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대용량 베이컨 버거도 뜬금없이 사먹고
지나가다 마주친 고대 와인셀러자리도 아무 이유 없이 올라가보고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노래도 실컷 부르고 노상방뇨도 하고 (근데 진짜 오늘은 앞뒤로 아무도 없는게 아마도 두가래길이 있는데 내가 사람 없는 길을 택한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