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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Dec 17. 2023

1년 후의 단상

에필로그


작년 10월 23일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10월 27일에 살라망카에서 봉봉과 만나 스페인 여행을 며칠 더 한 뒤 11월 3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벌써 다녀온 지 만 1년이 훌쩍 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참동안 산티아고의 여운에 계속 빠져있었던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의 아쉬움, 뿌듯함, 감격같은 알쏭달쏭한 감흥이 한동안 계속 남아있었고 사진을 정리하려고 보면 마치 학창시절 찍은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 같이 짠내나게 그리운 맛이 났다.


돌아온 뒤 꽤 오랫동안은 아직 다리가 좀 아픈 구석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어딘가를 걸어야 할 것 같아서 새벽부터 동네 하천가를 걷거나 뜬금없이 산에 오르거나 하기도 하고, 산도 좀 다니고 그랬다. 마침 작년엔 11월까지 푸근하니 늦가을이 계속되어서 걷기에도 참 좋았다. 덕분에 겨울 한라산도 두번이나 가봤다. 12월에는 겨울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영실의 설산을 걸었고, 1월 초에는 라미쿤과 어쩌다보니 극악의 컨디션에서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오기도 했다.


2월 부터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역시 어느 회사든 조직이든 쉬운 점이 있으랴만은 일이며 관계며 잘 풀리지가 않는 상당히 어려운 하반기를 보냈다. 엄마는 여름에 병원과 약을 바꾼 뒤로 그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차도는 있는 상태이지만, 변화를 적응하기 위해 너무너무 힘든 몇 달을 보냈다. 본격 복귀한(?) 인생은 또다시 난해하기 그지없는 과제의 연속이다.


뭐 사는게 고되고 아리송한게 나만 그런 건 아닐 것 같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피할 수 없는 냉혹한 순간은 찾아오고, 어느 순간 인생이 참 별게 없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러면 어떤 의욕도 사라져 버리고 그저 허무함만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래서 어릴적 본 책 네버엔딩 스토리에서 모험속 세상을 좀먹으며 지워버리는 건 허무라고 했었나?


그런 관점에서 산티아고 길도 그야말로 도착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하다면 허무한 길인데, 걷는 순간 만큼은 유사한 생각이 드는 나날이 없었다. 피곤하고 아프고 바쁜 하루는 하루하루 생생했고 그러면서도 정신의 피로감은 축적되지 않았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직까지도 비법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궁리한다고 나올 것 같지도 않지만) 카미노를 걷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면 조금 더 행복하고 유쾌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1년을 지난 현재 시점에 역시 길 한번 걸었다고 인생이 바뀌거나 새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그래도 카미노가 확실하게 준 교훈이 있다면 아주 소박하게 너그러운 마음이랄까. 10년 전에는 5년 전의 나를 예상하지 못했고, 5년 전에는 역시 지금 나의 삶의 방향을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 계획은 늘 엉성했다.

한달 반을 걸어보니 내 두 다리로 원하는 만큼 걷는 것 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안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40km를 가지는 못해도 20km를 가는 것에 긍정하는 태도를 카미노에서 조금은 배운 것 같다. 덕분에 40km 였다면 들르지 못한 마을도 구경할 수 있고 하루 더 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작년 말에 블로그에 쓴 글을 보니 카미노를 다녀온 연말의 생각에, 원대한 계획보다는 눈에 보이는 한걸음을 내딛고 내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도 하나 뿐이니 좀 더 삶과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자고 써놨다. 현재 시점에서 보니 1년만에 어느새 다시 쾌속으로 옹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다시 그때의 마음가짐을 곱씹어 봐야 겠다. 산티아고의 순간과 기억은 가끔씩 너무 후진 사람이 되는 것을 늦추는 데는 살짝 효험이 있다.


이번에 여행기를 다시 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작년 걸으면서 블로그에 글을 쓸때는 내가 걷고 먹고 아프고 그런 내 이야기만 적었었는데, 다시 여행을 곱씹으며 사진도 보고 나니 여행 내내 참 많은 분들이 함께 있었다. 길을 걷다 나중에 알게된 인연들이 한참 전에 우연히 찍은 풍경 사진에서 발견되는 건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 걸을 생각이었고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혼자 걷지 않았구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외롭지 않게 무사히 걸을 수 있었구나. 하루가 멀다하고 마주친 인연들, 한국에서 걱정해 준 친구 가족들, 이름도 잘 모르지만 함께 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해 준 수많은 길동무들까지.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 길이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길에서 누군가 "카미노는 길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이지" 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나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앞으로 사는 동안 몇 년에 한번씩 산티아고를 가보자 하는 막연한 마음속의 계획을 세웠다. 과연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 몇 년이 얼마나 길거나 짧은 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수 년이 될 수도 있고, 수십년이 될 수도 있겠지? 다음 번에는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도 많이 걸고 혹시나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오지랖도 좀 부리면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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