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걸을 만 했나요?
네 부르고스까지는 걸을만 했습니다. 이후 메세타구간은 엄청 힘들었어요. 메세타 구간이 험난하고 난이도가 높다기 보다 (물론 정신적 난이도는 높지만) 누적 거리 300km가 넘어가면서부터 슬슬 잘못된 자세나 습관, 피로누적, 체력의 한계가 온거 같은데 그 시점이 메세타였던 것 같아요. 메세타에서 아픈 뒤 레온에서 반성하고(?) 쉬고 난 뒤 후반에는 오히려 쌩쌩하게 잘 걸었어요.
2. 진짜 걸었나요?
저도 믿기지 않지만 그렇습니다. 사실 중간에 기차 한번 택시 두번 탔어요.
그래도 계산해 보니 카미노 프랑스길 총 780~90km의 구간 중 700km 이상은 걸었더라구요. 물론 동키도 종종 보냈지요
3. 며칠 걸렸나요? 쉰 날은?
생장에서 출발해서 36일차에 산티아고에 도착했어요. 로그로뇨 1일 , 부르고스 1일 , 레온 3일 총 5일을 쉬었고 나머지 31일을 걸었군요. (레온 이동하느라 기차를 탄 날도 제외한다면 30일)
4. 가장 많이 걸은 날은?
도착 전전날 포르투마린에서 멜리데까지 40km
5. 가장 아름다웠던 길은?
모든 길이 멋지고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구간으로는 초반 푸엔테라레이나~산토도밍고까지 나바라와 리오하 주의 평화로운 길과 포도밭이 참 예쁩니다. 코스로는 생장-론세스바예스의 피레네 산맥 풍경, 오세브레이로-사모스의 산과 계곡 풍경도 굉장하고, 순간으로는 메세타 벌판의 별만 있는 아침과 지평선에서 보였던 완벽한 무지개도 잊을 수 없지요.
6. 가장 힘들었던 길은?
물집이 잔뜩 잡힌 와중에 뜨거운 땡볕의 오후에 눈앞에 보이는 끝없는 메세타의 황무지를 마주하며 걸어야 했던 산볼에서 보아디야 델 카미노 구간. 몸도 마음도 가장 힘들었어요.
7. 어떤 노면이나 경사가 걷기 좋거나 어렵나요?
뽀송한 흙길의 평지나 얕은 오르막이 가장 수월합니다. 건조하고 미끄러운 자갈길 내리막이 가장 험난하고 실제로도 많이 위험해요. (넘어지거나 발목이 접질릴 수 있음) 아스팔트 포장길도 많이 걷게 되는데 바닥이 단단해서 발이 좀 아플 수 있지만 그냥 저냥 무난한 편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 중에서는 오르막이 힘은 들지만 내리막보다 안전하고 몸에 무리도 덜 갑니다.
8. 일반적으로 걷는 하루의 스케줄은?
- 오전 7시 반쯤 출발
- 두시간쯤 걷고 9~10시 사이 바에서 커피겸 아침먹으며 휴식 (이때 9km쯤 이동)
- 또 두시간쯤 걷고 12~1시쯤 잠시 휴식 또는 식당이 적절하면 점심식사 (이때 18~20km쯤 이동)
- 오후에는 가능한 3시 전에 도착하도록 걷고 마무리. 하루 걷는 거리는 평균 20~25km 정도.
9. 피로가 오는 시점은 언제인가요?
12시가 넘으면 햇볕이 강해지면서 덥고 속도가 많이 느려집니다. 가능한 오전에 진도를 빼 놓아야 해요. 어느정도 적응되면 하루 20km는 거뜬하고, 25km 부근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30km 걸은 날은 다음날 좀 피로해 지더라구요. 결과적으로 아침 일찍 가능하면 7시 이전에 출발하는게 답이지만 여정이 지날수록 피로도 쌓이고 해도 늦게 떠서 아침에 늦게 출발하는 날이 많아졌네요.
10. 물집이 잡히나요?
초반에 안생기고 잘 버텼는데 하나 둘 생기더니 결국 꽤나 고생했지요. 나름대로 잘 관리한다고 스페인 약국에서 파는 (꽤 비싼) 물집 패치 콤피드를 열심히 썼는데 결과적으로 물집을 보호하면서 크게 키워버렸어요. 물집 패드는 자극이 많이 가는 부분에 물집이 생기기 직전까지만 유효하고 이미 생긴 물집에 쓰면 안안되는 거였습니다. 물집은 작게 생겼을 때 빠르게 터트려 수습하는게 상책이라는 것을 아프면서 알아버렸군요. 가끔 물집 한번도 안잡혔다는 분들 보면 매우 신기했어요.
11. 신발은 무엇을 신었나요?
9~10월에 걸으면서 발목이 없고 쿠션이 좋은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었는데 여러가지 환경에서 무난하고 튼튼했던 듯. 다만 신발 안쪽 통풍은 약한 편이라 걷다 보면 습기가 차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혹시 또 온다면 좀더 가볍고 통풍 잘되는 경등산화나 트레일 러닝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순례자들 전체적으로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가 가장 많이 보였지만, 자신의 발에 길이 들고 계절에 맞는 신발이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12.몸 어디가 힘든가요?
발바닥, 발목이 으뜸이고 무릎, 허리(엉치나 골반쪽) 에도 부담이 좀 가는것 같아요. 발바닥은 무게에 계속 눌려 물집이 말썽이고, 발목은 종아리쪽이랑 같이 계속 피로가 쌓여 유연성과 회복이 늦어집니다. 순례자들 대부분이 발바닥 발목 지키기 대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는 피로가 회복되기 전에 매일 매일 걷고 술마시면서(?) 피로를 쌓기 때문에 어느 순간 몸이 못 견디는 순간이 온다는 점이죠.
13. 걸으면 즐겁나요?
놀랍게도 즐겁습니다. 특히 아직 기력이 많이 남아있는 오전에는 아주 좋아요. 차가운 바람녘에 상쾌하게 출발한 뒤 점점 기온도 오르고 걸으면서 몸도 풀리고 세상도 밝아지는(?) 모습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건 참 기분 좋은 경험이었어요.
날씨와 풍경이 좋으면 베스트. 배낭을 매고 걷고 있는데 가뿐하고 무리 없이 갈 수 있다는 몸의 신호가 온다면 더더욱 베스트. 내가 온전히 몸으로 무언가를 할수 있다는 원초적인 뿌듯함이 듭니다.
14. 혼자 걷나요?
길에 사람은 많지만 보통은 혼자 걷게 됩니다. (대개 앞뒤로 걷는 사람들은 많이 보이는 편이에요.) 일행이 있더라도 각자의 속도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기고 실제로 나란히 함께 걷는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인적이 드문 메세타 구간에서는 앞뒤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순간도 종종 생기는데 그럴 때는 다들 이어폰를 꼽고 풀성량으로 벌판에서 노래를 하고는 하죠.
15. 그많은 걷는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나요?
사실 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한 생각이라면 어떻게 바른 자세로 잘 걸어야 안아프게 잘 갈수 잇을까? 허리 쭉 피고 똑바로 걷자 헛둘헛둘 이랄까요. 뭐 대단한 생각 같은거 없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그 다음에 하는 생각이라면 도착하면 뭐 사먹어야지 (고기! 와인!!) 그런 것들.
내가 가진 골치 아픈 문제나 고민, 부질없는 후회도 불쑥불쑥 떠오르고는 하는데 금방 흘러 지나갑니다. 한국에서라면 스트레스 받고 자기 전에도 곱씹으며 생각나고 했겠지만 카미노에서는 걸음과 함께 지나보낼 수 있었던 게 참 좋았어요. 그러면서 흘러가는 마음 속의 고민과 문제를 분노나 절망의 감정을 담지 않고 그저 바라볼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걷다 보면 랜덤 뮤직박스가 머리속에서 재생되고는 하는데, 가끔씩은 동요도 나오고 팝송도 나오고 CM송도 나오고 참 대중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