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물 사전
남편이 고구마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작년에 친정 엄마가 준 고구마가 아직도 남아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 그중 몇 개에 싹이 올랐는데 이를 발견한 모양이다. 그는 동그란 배달음식 용기에 고구마를 몇 개 담고 물을 부었다. 그렇게 집에 식물이 하나 더 늘었다.
올해 초 오랜 주말부부 생활을 청산하면서 우리가 논의한 중요한 문제는 남편의 식물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가였다.
그는 나와는 다르게 식물 키우기를 매우 좋아한다. 그의 숙소에는 늘 제멋대로 자유롭게 자란 식물들이 넘쳐났다. 내가 보기엔 정말 정신없고 지저분했지만 자기 숙소에서 키우는 것이니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같이 살아야 하니 그 식물들이 얼마만큼 집안의 공간을 차지해야 하고, 나는 얼마만큼 참아야 하는지 조율이 필요했다. 전체의 반 정도는 남편의 사무실에 들어가고 반은 집안으로 들였다. 그중 또 반은 내 눈에 잘 띄지 않는 안방 베란다에 두고, 그 나머지 반이 거실 창가를 차지했다.
퇴근을 하면 그는 물뿌리개를 들고 베란다와 거실 창가를 한 바퀴 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즐기며 나름대로 힐링하는 시간이다.
이왕 키울 거 좀 깔끔하고 예쁘게 키웠으면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제멋대로 가지를 뻗도록 내버려 두고, 분갈이 뒤처리도 깔끔하지 못해 바닥에 흙이 흘려져 있는 일이 다반사다. 뿌리파리도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데 아무래도 식물과 뿌리파리를 함께 키우기로 결정한 것 같다.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때가 참 많지만, 꾸역꾸역 다시 삼킨다. 말은 책임질 사람만 해야 하니까. 식물들의 관리나 생사 여부는 책임지고 싶지 않기에 입을 다문다. 그래도 화분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왠지 모를 짜증이 치민다. 이번에는 고구마 싹이었다. 그것도 정말 안 예쁜 배달음식 용기에 담긴. 잔소리를 할까 말까 망설일 즈음 <장자>의 열자 이야기를 만났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부엌일을 하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를 먹였으며,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 세련된 나무 조각품이 다시 온전한 나무로 돌아가듯, 그는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 그의 행동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열자는 한결 같이 이렇게 살다가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 「응제왕」" 《강신주의 장자 이야기》 중 345쪽
오랜 스승 호자의 거짓된 마음 비움에 실망하고 결별한 후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는 3년을 보낸 열자가 그제야 타자와 제대로 소통하고 사랑하게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자의식을 버리는 일. 그리하여 나뿐 아니라 타자와 세상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 진짜일까 의심할 때가 많다. 정확하게는 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의심이다.
나이 먹고, 뚱뚱하고, 심술이 많은 나. 게으르고, 잔소리쟁이이며, 집에선 늘 꼬질꼬질하게 있는 나. 이런 나보고 귀엽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저 말이 진짜일까? 누가 봐도 거짓말 아닌가? 자주 의심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제멋대로 가지를 뻗은 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뱃살도 사랑하고, 배달음식 용기에 담겨서도 쑥쑥 잘 자라는 고구마 싹처럼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도 사랑한다. 약을 아무리 쳐도 끝없이 생겨나는 뿌리파리 같은 내 잔소리마저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가 장자나 열자처럼 완벽하게 자의식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어떻게 그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그저 보기에는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만큼 나와 아이들을 사랑한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 믿는 사람, 그래서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 추억을 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는 커플 매칭 프로그램이며,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즐겨보는 아저씨다. 이런 그의 사랑 표현이 지겹고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지만, 내가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사랑이 귀찮은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다.
나는 왜 사랑이 귀찮았을까?
어린 날에는 온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웠다. 타고난 기질이 때문인지, 가정환경이 문제였는지. 그저 배움이 부족해 ‘마음 비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 그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좋다고 하면 두려웠고, 의심했고, 밀어내기 바빴다.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남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난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사랑이 넘치도록 많은 남편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쁘다, 귀엽다, 사랑한다고 쉬지 않고 말하는 사람. 덕분에 조금씩 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보낸 20여 년의 세월 동안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같이 자랐다. 그리고 이제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 하나 정도는 사랑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이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여, 그를, 아이들을, 식물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귀찮음이 묻어있나 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내를 사랑하듯 돼지를 아끼고, 세상 모든 것을 편애하지 않았다는 열자처럼, 내 남편처럼 말이다. 하지만 불쑥불쑥 솟아나는 귀찮음이 내 사랑을 멈추게 한다. 쓸데없는 자기 연민과 지나친 자의식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귀찮음을 묻히고 있다. 남은 생은 이 귀찮음을 버리는 데에 더 써야 한다. 사람으로 제대로 살고, 사랑하려면 사랑에 묻은 귀찮음을 버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장애를 가진 여자 주인공 조제를 떠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런 그에게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난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조제에게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은 조제는 그제야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덕분에 세상을 살아갈 힘을, 한 발 내디뎌 볼 기운을 얻게 되었으리라.
영화가 끝난 뒤에도 조제는 그 사랑을 거름 삼아 조금씩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이내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것이라 나는 믿었다.
남편은 나를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믿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언젠가 다 하는 날이 오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랑 덕에 스스로 사랑하게 되었고, 내 사랑에 묻은 귀찮음을 덜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금 더 나답게,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게 해 준 사람이다. 고맙다.
그러니 그 보답으로, 고구마 싹에 대한 잔소리는 다시 지워본다. 넘치는 사랑을 가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자. 이번 주말에는 예쁜 수반을 하나 사줘야겠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고구마 싹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