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물 사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지표는 무엇일까.
쉴 새 없이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도 있지만,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가 나에게는 진짜 친밀감으로 느껴진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다 쉼표나 말줄임표의 정적이 찾아오면 괜히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을 이어가다 결국 이불 킥 할 말실수를 남기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 좋다. 재미있게 말한다면 금상첨화다. 내 불필요한 수다와 말실수 횟수를 줄여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며칠 전, 온라인으로 함께 그림공부를 해 온 스터디원들을 오랜만에 서울에서 만났다. 지난 계절 동안 이어온 추상화 스터디를 드디어 마치고 책거리를 하는 날이었다. 스케줄 상 이번 계절 스터디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한 분도 참석했다. 바쁜 일이 있는지 한동안 단체 대화방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꼭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렸다. 정신이 없어 미쳐 단체 대화방을 확인하지 못했다며 조금 늦더라도 참여하겠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우리 스터디 원들은 대체로 얌전한 편이다. 내면에는 열정이 넘치고, 늘 새로운 일을 벌이며, 일상을 바쁘게 보내고들 있지만, 입 밖으로 말하는 건 즐기지 않는 편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식 표현을 빌리자면 ‘대문자 I’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내성적인 'I' 들의 모임에 꼭 필요한 단 한 명의 'E'가 그분이었다. 'I'들만 모여 있으면 내가 리더로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떠들다 말실수를 할 것 같았는데 '확신의 E'님이 참여하신다니 마음이 놓이고 기뻤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하루 종일 국립현대미술관의 모든 전시를 즐기고 늦은 오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날씨와 전시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잡았지만 혹시나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적막이 찾아오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E’님이었다. 방안이 금세 환해졌다. 그런데 그분이 건넨 첫마디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던 그동안 모친상을 치르고 홀로 계신 아버님을 챙기느라 분주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적절한 때에 건네지 못한 위로가 못내 아쉬웠다.
그분은 이내 특유의 쾌활함으로 분위기를 이끌며 우리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손바닥만 한 노트였다.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각자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표지의 색과 기호를 직접 골라 준비한 것이었다. 어떤 이는 큰따옴표(“ ”), 어떤 이는 느낌표(!), 그리고 나에게는 빨간색 물음표(?)가 주어졌다. 그 마음과 배려에 감동했고, 또 스스로 생각하는 이미지와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다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며칠 전 수업에서 회원들에게 전시장에서 사 온 책갈피를 나눠줄 때, 나는 그저 선착순으로 고르게 했었다. 만약 그분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어울리는 그림을 골라 드렸다면 어땠을까. 작은 선물에 담긴 애정과 배려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요즘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던 E님은 이 날도 처음에는 물만 마셨다. 겉으로 쾌활한 만큼 내면의 고독이 있기에, 술로 흔들리는 마음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충동적으로 우리는 2차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인사동 거리를 헤매다 겨우 찾은 3층 막걸리 집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막걸리가 잔에 채워지고, 그제야 E님도 한 모금 들이켰다.
"막걸리는 술 아니잖아요."
"안 취해, 안 취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서로 웃으며 건넸다. 그 시간은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행복을 나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바른생활 중년 여성들답게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적당히 알딸딸한 정도에서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헤어지고 나누는 톡에서 한 분이 E님이 선물한 노트에 고운 글씨로 그날의 만남을 추억하는 일기를 쓴 사진을 공유했다. 그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선물한 이가 얼마나 기뻤을지 짐작이 갔다.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자리를 환하게 밝히는 사람. E님과 만나는 날은 그래서 행복하다. 덕분에 내가 이렇게 행복했다고 E님에게 전하고 싶어 고민하다 이런 글을 써본다.
존재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
E님이 오래도록 그림을 그리며, 그 좋은 에너지를 세상에 더 많이 나눴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가끔, 자주, 종종. 얼굴을 맞대고, 소식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길 바라요.
다음 만남에는 제가 E님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고마워요.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