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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내 공주님

평범한 인물 사전

by 숟가락
영원한 내 공주님, Lily, soodgarac, 2025

관계: 나의 둘째 딸


부르는 말: 내 공주, 우리 아기, 꼬미꼬미 쪼꼬미 등


태몽: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도 넓게 느껴졌던 그 운동장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무지개 빛깔 천막을 두른 스탠드가 앞에 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중 하나, 집채만 한 운석이 바로 내 앞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나를 쏙 빼닮아 내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너. 거대한 운석만큼이나 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너다.


좋아하는 것: 로블록스, 동물의 숲, 엔믹스, 그림 그리기


학교에서 돌아오면 너는 소파에 턱 하니 앉아서 TV로는 동물의 숲 유튜버인 '아오니' 영상을 틀어놓고 스마트폰으로는 로블록스를 한다. 내가 게임을 안 하는 이유는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만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넌 정말 나를 많이 닮았다. 남들은 게임하는 아이가 중독이 될까 걱정한다는데 너는 둘째이기 때문인지, 그 모습도 마냥 귀엽다. 큰 아이가 되려 그만하라고 타박을 하면 내가 옆에서 "우리 OO 이는 프로게이머가 될 거란 말이야. 뭐라 하지 마."하고 너스레를 떤다. 그럼 큰 아이가 로블록스로 어떻게 프로게이머가 되냐며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스마트폰을 들고 미간을 찡그리고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도 나에겐 사랑이다.


요즘은 아이돌 엔믹스(NMIXX)에 빠져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예쁘고, 예능도 잘하는데 도무지 제대로 뜨질 않는다. JYP가 노래를 못 만들어서 그렇다며 현재 아이돌 업계의 상황에 대해 언니와 열띤 토론도 벌인다. 그렇게 세상 심각할 수가 없다. 우리 딸들이 이렇게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데 JYP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이들은 JYP가 자기 노래만 잘 만든다고 한탄이다. 하지만 수학문제를 풀면서도 엔믹스 노래를 흥얼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널 보면, JYP가 노래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건 아니지 싶다. 나도 응원한다. 엔믹스가 인기가 많아져서 네가 더 행복하길.


기타: 너는 내 스마트폰에 '내 공주 OO'으로 저장되어 있다.


공주님이면 왕국도 있고, 왕도 있고 해야 할 텐데 우리 공주님의 왕국과 왕은 누굴까? 집이 왕국이고 아빠가 왕인가? 아니 엄마가 왕? 이 가정이 너에게 아름다운 왕국이면 좋을 텐데, 그래서 공주님처럼 자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늘 미안하면서도 나는 또 너를 그렇게 부른다. 우리 공주님.


오늘 너는 요즘 밖에 나가질 않았더니 얼굴이 조금 하얘진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만족스럽냐 물으니 그렇단다. 하얀 얼굴이 좋다는 너. 이제 사춘기가 되어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다. 아침마다 옷장 문을 열고 뒤적거리다, 세탁 바구니에서 어제 입었던 옷을 또 꺼내서 섬유탈취제를 뿌려 입는다. 제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눈에 예쁘다고 생각되는 옷만 계속 입고 싶은 나이다.

sisters-6053044_1280.jpg 이미지 출처: Pixabay

아직 한참 작은 꼬마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자라 언니와 사이즈가 점점 비슷해진다. 옷을 가지고 다투는 자매 이야기가 늘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그 이야기가 우리 집에서 펼쳐질 걸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난달에는 옷장 깊은 곳에서 큰 아이가 입었던 청바지 몇 장을 꺼내어 입혀보았다. 당연히 클 줄 알았는데 딱 맞아서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는 새에 매일매일 자라고 있었다. 네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다.


어제 너는 엄마에게 학원 선생님의 카톡을 받게 했다. 숙제가 밀렸다는 연락이었다. 한 번도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그런 연락이 오는 걸 보니 네가 정말 사춘기에 접어들었구나 싶다. 잘 타일러 숙제를 하게 했다. 앞으로 다시 선생님에게 이런 일로 연락이 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거기까지만 해야 했는데 또 연락이 오면 학원을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을 날렸다. 아... 이 못난 어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너를 보며 실감한다.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그래서 늘 보고 또 보다 보니 매일매일 변하고 있는 너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너는 이제 제법 어린이가 아닌 소녀티가 나고,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해지고, 언니 옷도 모자라 엄마 옷도 슬쩍 넘볼 정도로 자랐다. 하지만 내 눈에는 늘 아기다. 아침마다 너를 깨우며 '에구에구 우리 아기, 일어나야지.'하고 부르게 된다.


한 발 물러서 생각해 보면 너도 참 피곤할 것 같다. 늘 아기, 공주님이라 부르는 엄마 아빠의 비위를 맞추느라 사춘기인 자기를 억지로 감추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있는 그대로, 너의 나이대로 대하는 게 참 어렵다. 진짜 사랑이라면 그렇게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오늘 너는 주말을 친구들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몇 시까지 놀아도 되냐는 물음에 '마음껏 놀고 전화해'라고 답했다. 사실 너를 빨리 보고 싶고, 품에 안고 싶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건 나의 행복일 뿐 너의 행복은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참아보았다. 너를 기다리는 하루는 참 길었다. 내 사랑아. 내 공주야. 내 아기야.

이 사랑을 조금만 더 참아볼게. 너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란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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