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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Mar 17. 2021

자취9개월 차의TMI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고민하고 있다면

2020년 7월 23일


28살 봄, 부모님께 선언했다. "이제 독립할 때가 된 것 같아." 

외동딸의 이 깜짝 선언에 우리 부모님은 "그래 어디 한번 나가 살아 봐라, 내 집이 그리울걸"라고 하시며 나의 독립을 마땅치 않게 여기셨다. 그러고 난 다음 약 두 달 동안 열심히 집을 보러 다녔고, 드디어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하여 2020년 7월 1일, 회사 근처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그렇게 장장 28년 만에 독립을 이뤄냈다. 

출처: 내 사진첩(마이 러브하우스 라기보다는 마이 러브 룸)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 신분으로 7개월 정도 머무르는 동안 나는 플랫이라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기숙사 비슷한 곳에서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주방과 화장실, 거실은 공용 공간이었지만, 개인실이 따로 있어 지내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을 떠나 낯선 네덜란드라는 곳에서 여름과 가을, 겨울을 혼자 오롯이 지내다가 가끔 외로울 때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귀국해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집안일을 모두 혼자 해내던 내가, 단지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모든 것을 엄마의 손에 맡겨 아무것도 안 하는 식충이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스스로 해내는 삶을 살겠다 마음먹고 무작정 당시 해외 한인여성회에서 운영하는 호주 장학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운 좋게도 합격해 3개월 동안 호주 시드니 한국문화원에서 일하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인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에 합격한 다른 친구들과 같이 지내느라 외로울 틈이 없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삶이었다. 

출처: 내 사진첩(네덜란드에서 지내던 마이 러브하우스)


한국에서 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


깜짝 독립 선언을 하고 두 달 만에 집을 구해 드디어 2020년 7월 23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6평짜리 집으로 이사 왔다. 첫 독립이니 사실 이사라기보다는 분가가 맞겠지만, 이사 온 첫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덜란드와 호주에선 개인실 외에 공용 공간을 함께 쓰다 보니 밤 중에 혼자 있다는 느낌이 적어 무서운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도둑이 들던 날 유난히 소란스러웠는데, '남자애들이 5명이나 있는데, 것도 터키에서 온 장정들이 있는데 설마 도둑이겠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혼자 살다 보니 문 밖에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갖다 댈 만큼 나는 심약한 사람이었다. 이사 온 첫날에도 '누군가가 집 도어락을 열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불을 켜고 잘 정도였다. 


그 뒤로 한동안 집에만 오면 보일러실을 열어보는 습관이 생겼고, 잠을 잘 때마다 거실(인 동시에 내 방) 불을 한껏 키고 잤다. 이유는 하나였다.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거나 들어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행동했다. 이런 습관이 생겼다는 것을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2주마다 본가에 들를 때면 10시간도 넘게 내리 잠만 자는 탓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더니 맨날 새벽에 노는 거 아니지?"라는 의심 아닌 의심의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그만큼 독립 후 꿈꾸던 삶과 실제 삶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자취 9개월 차의 TMI


그럼에도 독립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지금까지 부모님 밑에서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살았다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대부분의 것들을 모른 채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방청소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20대의 나라니,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지금은 이 좁아터진 집구석을 거의 매일 청소하고 있다. 집이 작을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는 매직 아닌 매직..) 


01.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들지만, 그것도 각자 하기 나름이다. 

자취를 시작하고 동네 마트에 처음 식재료를 사러 갔을 때, 한국의 물가에 충격을 받았었다. 바빠서 부모님과 장도 잘 보러 가지 않았던 터라, 계란이 이렇게 비싼지, 야채가 금값인지 자취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호주와 네덜란드의 물가와 비교했을 때 어마 무시한 한국의 물가 때문에 식비가 그 시절보다 배로 더 들고 있다. 식비의 비중이 생활비의 50%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코로나까지 겹치니 자연스럽게 외부활동이 줄었다. 외부활동이 줄어드니 집순이가 되었고 덕택에 의류나 화장품 구입비는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요즘 생활비를 아끼려고 가계부를 쓴다. 가계부를 쓰다 보니 비용을 좀 더 아낄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게 된다. 역시 생활비도 각자 하기 나름인 것을! 이번 달에도 허리띠를 졸라 매야하는 것이 운명이구나. 

출처: 내 가계부(1월에는 나름 절약했는데, 그래도 식비가 30%라니..! 참 많이 먹는구나)


02. 생각보다 더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다.

흔히들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첫 독립생활을 시작할 공간이었던 이 집을 골랐을 때, 가격이나 위치는 별로였지만, 딱 하나 '고층'이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저층 빌라의 경우 종종 혼자 사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많은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곤 했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이 외국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월세 생각은 하지 않고 무리하면서 고층 오피스텔을 선택했다. 


살다 보니 역시나 '생각보다 더'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다. 퇴근길 어두운 골목 사이로 남자의 구두 소리가 내 발자국 소리를 따라 울려 퍼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남자 친구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누구든 꼭 받아달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세상이면 좋을련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혼자 나와 살 생각이라면, 특히 여자라면 독립을 망설이지는 말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당부한다. 


03. 여자라서 못하는 것보다 여자인 것과 상관없이 잘하는 게 늘어난다.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빨래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살 때는 부끄럽게도 세탁을 자주 하지 않고 대신 옷을 자주 사서 입었었다. 옷이 저렴하기도 했고, 또 세탁을 자주 하기엔 여러 명이서 함께 쓰다 보니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게 쉽지 않았었다. 

지금의 나는 전구도 갈 수 있고, 커튼도 혼자서 설치할 수 있으며 심지어 꽉 막힌 수도꼭지도 혼자서 분해하여 머리카락을 말끔히 제거하고 다시 갈아 끼울 수도 있다. 내가 여자인 것과 상관없이 자취를 하게 되면 필요할 때마다 SOS를 외쳐댈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뭐든지 정말 잘하게 된다. 자취의 가장 긍정적인 면이랄까.

출처: 내 사진첩(이름하야 한밤중에 수도꼭지 해체쇼가 되시겠다)


04. 독립하고 가장 좋은 것은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취하기 전에도 성격이 독립적인 탓에 부모님의 결정에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과 갈등을 겪을 때가 많았다. 부모님 곁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을 때,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라도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퇴근 후 집에서 시체처럼 널브러져서 유튜브만 보고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 대신에 저녁거리가 없으니 굶어야 했고, 굶으니깐 힘이 없어서 더욱 무기력해진다. 만약 퇴근 후 바로 요리를 한다면 저녁을 든든히 먹으니 힘이 생겨 공부나 다른 집안일을 할 수 있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내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자취를 통해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심어진 덕분에, 자취하고 난생처음 주택청약도 당첨되어 20대 후반에 아파트를 얻기도 했고 출판사 계약 직전까지 갈 수 있었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뿌듯한 일인지, 또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20대 초반에 알았더라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다. 


05. 자연스레 집순이가 된다. 고로 집을 고를 때 이 공간에서 하루 종일 있어도 괜찮은 집을 고르길.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취를 시작하게 되면 생활비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든다. 내 경우엔 먹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더니 다른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게 되었고, 자연스레 집순이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19로 인해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시작되면서 거의 재택근무로 일하는 터라, 집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6평짜리 집이, 처음에는 그리 좁지 않다고 생각하던 나의 스위트홈이 괜히 작게만 느껴지고, 하루 종일 집에 있자니 답답하다. 만약 지금 독립을 위해 자취방을 알아보고 있는 이가 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더욱더 햇빛이 쏟아지는 남향에 비교적 널찍한 집에서 첫 자취생활을 시작하시길 추천한다. 


그럼에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독립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작년에 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20대 끝자락에서 고민만 하다가 아까운 시간을 다 날려버렸을 것 같다. 독립이란 게 한순간 마음먹은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렸을 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결단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확실히 인생이 걸려있는 결정인 것처럼 30대가 되기 전 인생에 변곡점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던 것 같다. 


주변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막상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비싼 물가로 인한 생활비 걱정부터, 본인이 분가했을 때 남겨진 부모님이 외로워하실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대부분 비슷한 고민으로 결정을 망설인다. 나 역시도 그랬다. 생활비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지만, 외동딸이 홀로 나가 살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은 내 예상보다 더 힘들어하셨다. 심지어 자취를 시작한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그립다며 엄마가 밤 중에 울며 전화한 적도 있었다. 


대놓고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은 듯하여 죄책감이 들었지만, 한 달의 시간이 흐르니 부모님도 나도 적응되어 오히려 각자의 삶을 즐기게 되었다. 부모님은 나를 챙기지 않아도 되니 운동과 취미활동에 더욱 매진하셨고, 나는 나대로 부모님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서 벗어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여정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지금도 집을 넓힐까, 아니면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지만, 어디가 되었든 이제는 내가 어디서든 나를 잃지 않고 인생을 즐기며 살게 되리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이다음은 어떤 '첫'시작을 맞이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틀림없이 잘 해내리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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