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수돌 Oct 11. 2021

대학병원에서, 엄마의 운수 좋은 날

운이 좋았다는 말을 들었던 어느 여름날

어린 시절,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


지금은 감기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잔병치레를 참 많이 했다. 선천적으로 설소대 단축증을 갖고 태어나 조치가 늦었다면 언어장애를 가질 뻔했지만,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께서 조기에  발견해주신 덕택에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병원 감염성 폐렴과 이로 인한 합병증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폐렴이 완치된 이후에도 합병증이었던 천식으로 인해 자라는 내내 고생해야 했다. 


천식 탓에 체육시간에 운동장보다 양호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친구들의 시기와 호기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고, 이로 인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종종 따돌림도 받아야 했다. 하나뿐인 외동딸이 아파서 골골거리며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 못하니 보호자로서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출처: Photo by Ante Hamersmit on Unsplash

성인이 되고 나서 달라진 삶


그랬던 내가 대학생이 된 후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건강해졌고, 자연스레 천식도 완치되고 감기마저 안 걸리는 체력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대학시절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타지에서 혼자 아플까 봐 걱정하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전 세계를 원 없이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났고 일을 했으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출처: 내 사진첩(다이빙자격증까지 딸 정도로 건강한 돼지가 되었다)

어느새, 부모님의 머리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날 지켜주는 방패였고, 슈퍼맨이었다. 너무나 크고 대단해 보여서 엄마가 세상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약간 작은 키를 갖고 있는 것도, 아빠가 남자치고는 그리 키가 크지도 체격이 좋지도 않다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타지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위해 다시 본가로 돌아왔을 때 마주한 부모님의 모습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있었고 주름은 깊어졌으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아저씨, 아줌마로 불리는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로 불리는 노년의 나이에 부모님이 빠르게 다가가고 계셨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릴 적 잔병치례 때문에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다녔던 나처럼, 부모님 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 등 노화로 인한 고질병들 때문에 병원을 자주 왕래하셨다. 병원을 오고 가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과 부모님께서 친해지신 덕분에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분들 사이에서 나 또한 나름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마흔 살에 낳은 외동딸로, 지금은 아주 자기 밥벌이를 잘 해내는 자식이자, 유일한 보호자'가 나를 대변하는 수식어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본가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부모님의 진료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행자이자 보호자가 되어 함께 길을 나섰다. 언제까지나 부모님께서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남아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보호자가 되어보니 부모님이 아프실 때마다 큰 병에 걸린 건 아니실까 겁이 나고 불안했으며 건강검진이라도 있으면 전날까지도 긴장이 되었다. 그러다 최근 일이 터졌었다.


대학병원에서 운이 좋았다는 말을 들은 엄마


가족 내력인 탓에 고혈압 환자로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엄마의 뇌혈관에 문제가 생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고, 의사 선생님은 뇌 MRI를 찍어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 길로 내가 보호자가 되어 대학병원에 내방했고 뇌혈관 하나가 끊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화로 인해 혈관에 노폐물이 쌓이고 고혈압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뇌혈관 하나가 끊어져 버렸는데, 만약 이 혈관이 갑자기 셧다운 되듯 끊어졌다면 즉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다. 엄마의 케이스는 다행히 운 좋게도 혈관이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막히는 바람에 다른 작은 혈관들이 자동으로 막힌 혈관의 역할을 하며 뇌 속에 피를 돌게 해주어 지금까지 이상 없이 살 수 있었다고 하셨다. 머리가 아픈 건 이것과는 별개로 고혈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아플 수 있다며 지금보다 더 운동과 식이조절을 잘하면 문제없을 거라 하셨다. 

출처: Photo by Hush Naidoo Jade Photography on Unsplash

엄마의 운수 좋던 날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가 엄마도 가만히 있는데, 보호자였던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의사 선생님께 '괜찮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까지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런 데다가 '운이 좋았다는 말' '운이 좋지 못했다면 지금 내 곁에는 엄마가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인지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진료가 끝나자마자 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걱정하지 말라며 의사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건강하게 자라 네가 보호자가 되다니, 네가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니. 참 다행이야.

이만 마치며: 소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도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 참 다행이에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마치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오는 길에 병원 버스 정류장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를 봤다. 아주머니가 연신 할머니 건강을 걱정하며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할머니가 그 이야기엔 대충 대답하더니 아주머니에게 요즘에 어디가 아프지 않냐며 본인 보다도 오히려 딸을 걱정하고 계셨다. 


'이제 곧 서른이 되고, 마흔, 오십의 중년이 되어도 부모님의 눈에 나도 언제나 아이로 남아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없다면, 누가 나를 아이처럼 여기며 무한한 사랑을 주고 애정을 줄 수 있을까. 운이 좋지 못했다면 지금 여기에 엄마는 없을 테고, 내겐 또 얼마나 많은 후회가 남았을까. 이런저런 생각 탓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작년까지만 해도 '성공하는 것'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부모님이 건강한 것'과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나 역시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소원처럼 건강한 부모님과 나 역시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본다.

출처: 내 사진첩(엄마와의 외출)


매거진의 이전글 데이트 폭력이 아니고 살인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