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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Feb 05. 2022

68세 아버지의 도전, 피아노를 치다

어느 날 갑자기 취미 부자가 된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달라졌어요


 회사택시에 개인택시 경력을 더하면 운전경력만 총 25년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황반변성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은퇴를 해야 했었다. 자칫하면 실명에도 이른다는 무서운 병인 만큼 치료 과정에서 온 가족이 걱정했는데도 다행히 조기에 발견해 치료한 덕분에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으시고 계신다. 다만 밤에 운전을 계속할 경우 눈에 큰 지장을 줄 수 있어 개인택시를 그만두시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야 하셨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쏙 들어맞는 듯 개인택시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지만, 대형 골프장에 취직해 적성을 찾은 듯 동료분들께 인정받으면서 잘 다니고 계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어서인지 개인택시를 몰던 시절에는 전혀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인데, 골프장에 다니시고 나서부터 자신의 삶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그리고 나


 가끔 명절에 친가에 가면 할머니는 내가 만나 보지 못했던 젊은 날의 아버지를 회상하곤 하셨다. 문학과 그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증명하듯 총각 때 쓰던 아버지의 방에선 손 때 묻은 소설책과 스케치북에 여러 번 스케치를 한 그림들이 잔뜩 있었다. 더 가르쳤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푸념 섞인 말을 늘어놓는 할머니에게 '우리 딸이 나를 닮아서 예술에 소질이 있다' 은근슬쩍 내 자랑을 꺼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 부끄럽게도 사실 내게는 그리 타고난 예술적 소질이 없었다. 그저 끈기 덕분에 이뤄낸 것이었다. 그마저도 부모님이 어린 시절 피아노며 바이올린, 미술, 태권도, 수영 등 정말 다양한 사교육을 지원해주신 덕택에 갖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가끔 나였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아버지의 부모로 아버지가 가진 재능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취미 부자의 길


 일하느라 바빠 운동 외에는 별다른 취미를 가진 적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남들 잘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자야 했던 야간 개인택시 생활을 정리하고 골프장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아버지는 달라지셨다. 휴일마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철부지 딸을 위해 사준 피아노 앞에 앉아 무작정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에서 나는 음을 신기해하며 어디서 났는지 내가 일곱 살 때쯤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쓰던 교본을 꺼내와 계이름을 하나씩 외우며 악보를 따라 한 손가락씩 치기 시작하셨다. 그때쯤 골프도 시작했다. 남들은 몇 주, 몇 달 동안 배우면서 터득할 기술을 아버지는 매일 퇴근 후 골프장에 남아 세네 시간 골프 연습에 바쳐가며 얻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손에는 늘 대일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 손으로 휴일이면 피아노 건반을 눌러가며 연주해보려 애를 쓰는 아버지가 신기했다.


이제는 선생님이 되어버린 딸


 내가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탈 때 아버지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겁이 많아 앞으로 나아가기 주저하던 내 자전거의 안장을 계속 붙잡으면서 내가 균형을 잡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타는 법을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네덜란드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자전거 없이 하루도 살지 못하는 곳에서 완벽하게 낙오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의 스승을 이제는 내가 자처하고 있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 대신 조금이라도 더 배울 수 있도록 피아노 과외를 시켜주신 아버지에게 이제는 내가 과외선생님이 되어서 계이름을 알려주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연습만이 살 길이라며 몇 번이고 계속해서 연습할 것을 숙제로 내드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선생님의 실력이 별로라 본인의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만 실상은 피아노를 배울 때 어느 때보다도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을 나도 알고 아버지도 안다. 

출처: 내 사진첩(그의 취미생활은 현재 진행 중)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요즘 앱 스토어에 접속하면 피아노부터 영어, 미술 등 정말 다양한 취미활동을 위한 앱이 많다며 하나씩 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말이다. 서른 살 먹은 딸보다도 예순여덟의 아버지가 더 스마트한 라이프를 즐기고 계신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케이크'라는 앱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유튜브를 보거나 앱을 통해 초보자들의 피아노 연주법을 보며 공부를 하신다. 


 항상 말로는 이제 다 살았다며 더 이상 욕심이 없다고는 하시는 데 내가 보기엔 취미 부자로서 욕심이 생긴 듯하다. 아버지가 항상 건강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즐기시며 이제는 여유롭고 행복하게 지내시면 좋겠다. 그거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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