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말고 서열 아니고 어른

어른이십니까?

by 빛날

접해보지 않은 직업의 세계에 한 발만 들이밀고 있다. 멀지 않은 시간에 들어갈 직업의 세계.

간호조무사 학원 등록하고 병원 실습을 한 학생이다. 취업도 아니고 인턴도 아니다.

병원 직원도, 의료인도, 환자도 아닌 상태에서 병원에서의 생활을 접할 수 있는 관찰자라고 해두자. 실습이 곧 끝이 난다. 병원에서 하는 일보다 사람들의 관계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병원 안에 다양한 직업이 있다. 병원 원무과, 총무과, 약국. 임상병리실, 식당, 영양, 조리사, 요양보호사, 의사, 간호사, 경비, 전기실, 장례지도사 등이다. 그중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곳이 간호사실이었다.


간호사들 사이에 '태움'이라는 말이 있다. 선배 간호사가 신입 간호사에게 교육을 명목으로 정신적. 육체적 괴롭힘으로 길들이는 규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실습 학생인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간호사들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을은 이해하지만 인격 모독과 폭언에 가까운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란 생각을 했다


잘 못하니 신입인데 사람마다 습득하는 속도가 다르지 않나? 일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못하니 짜증도 나고 답답한 일이다. 선배 입장에서 화를 낼 수 있다. 맞다. 다만, 잘못을 지적하는 방법에도 품격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로 호대게 대하는 걸 들으며 옆에 있는 내가 무안했고 속상했다. 환자나 다른 분들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하시면서 유독 한 후배 간호사에게 혹독하게 대하실까?


물론 모든 간호사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내가 배치받은 병동에 천사처럼 따뜻한 분이 계셨다. 엄마처럼 품어주시는 선생님. 경력 많으신 간호조무사 선생님이셨다. 신입 간호사, 간호조무사, 실습 나온 학생, 환자들, 직장동료 모두에게 따뜻하셨다. 성격만 좋고 일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분은 간호 업무도 간호 보조업무도 기타 여러 업무를 다 두루두루 잘하셨다. 그 병동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신 분이시다. 후배들에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모르는 걸 가르쳐 주셨다. 실습 나온 학생들에게는 얼음처럼 긴장된 몸과 마음을 녹여주셨다. 학생이 하는 일을 능숙하게 대신하시며 쉬는 시간을 만들어 주시고 간식도 챙겨주셨다. 잡다한 청소도 솔선수범하셨다. '내 경력에 이런 일을 해야 하나?'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는데 스스로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으셨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실습 학생에게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 외에는 잘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물론 학생이 열의를 가지고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는 가르쳐주신다. 업무가 바쁜데 학교 선생님들처럼 굳이 먼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업무 중 조금 여유가 생기면 천사 선생님은 먼저 우리에게 설명도 해주시고 중요한 점을 기억하라고 콕 집어 말씀해주셨다. 실습 기간 동안 선생님은 나에게 햇살이었고 한편으로는 커다란 나무였다.

두려움과 긴장 속에 따뜻하게 햇살을 내려주는 태양과 같았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그늘이 되기도 하고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말 한마디가 따뜻함이었다. 차분함과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실습 기간 도중에 그만둔 어린 학생이 있었다. 무단결근을 수시로 했다. 실습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같이 실습하던 학생이 그만두니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실습을 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좋은 직장을 찾았는지 몰라도 무단결근을 수시로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이 어렵고 적성에 맞지 않고는 뒤로하고 병원 실습을 하면서 결근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연락은 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병원이나 학원 동기가 전화나 문자를 남겨도 연락이 아예 두절이었다. 결석한 다음날이나 며칠 지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병원 실습을 나왔다. 성실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학생이 그만두고 다른 학생 동기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주위에 어른이 없어서 그래."

부모도 아닌 우리가 스무 살이 넘는 친구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오지랖이라는 생각에 말을 아꼈는데 우리가 천사 선생님처럼 챙겨줬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만둔 이유도 모른다. 부서도 다 달라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잘 없었고 워낙 말이 없는 친구였다. 쉬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휴대폰과 함께였다. 비슷한 또래가 있었다면 이야기를 잘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 실습 생활이 조금 더 나았을 텐데.


동기가 말한 '어른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어른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았지 진짜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른의 무게가 버겁다는 생각에 갇혀있었던 건 아닌가?

병동의 천사 선생님을 보면서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만 많은 어른 말고, 나도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천사 선생님처럼 나무가 되어준다면 내 뒤에 올 친구가 지금의 나처럼 마음의 휴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꼭 직업적인 부분에서만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먼저 살아 본, 경험을 해 본 일이라면 편안하게 들어주기만 해도 좋지 않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다면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말로만 하는 꼰대 역할이 아니다.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이 나이에, 이 경력에 내가 해야겠냐?'가 아니라 '내가 하지'가 되면 좋겠다.


내가 존경하는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나이 들수록 엉덩이가 가벼워야 한다.'

말로만 시키는 뒷 방 노인네가 되기 싫다며 운동 다니시는 헬스클럽에서 많은 젊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매일 커피 심부름을 자처하신다.

병원 천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말없이 그만둔 병원 실습 동기를 보면서 배운다.

진짜 어른이 되어야겠다. 병원에서 일 외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운다.

일은 자꾸 하다 보면 능숙해진다.


계급 말고, 서열 아니고 어른.

진짜 어른이 되어야겠다. 이루고 싶은 꿈이 또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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