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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의 생존법

모범생의 생존법

by 차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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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들어 은근히 독서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을 반성하다가 오랜만에 집어들게 된 책이

체리새우로 유명하신 황영미 작가님의 작품이었다는 건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묘하게 어두운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우울하거나 심각해지지 않고

긍정적이고 몰입해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작가님이라면 분명 기분 좋은 결말을 선사하리라 생각했으니깐


역시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봄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세상은 뒤숭숭하고

뭔가 손에 진득하게 잡히는 일이 없는 요즘 같은 시간 속에서 간만에 느껴본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이 책의 리뷰를 해보자


두성고 신입생인 준호는 신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우수 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정독실에 친구 건우는 빠지고 혼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결코 좋은 평가인 것은 아니다. 다른 사교육으로 인해 정독실 이용을

아예 거부한 애들을 제외하고 선발된 인원인데다가, 암투병 중이라 지방에 귀촌하신

부모님이 걱정스러워서 맘편히 학원을 다니거나 집에 들어가기도 뭐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중학교 동창이었고 예쁘기로 소문난 하림이는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만나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난데업는 직진에 좋으면서도 당혹스럽다.


그리고 오히려 건우와 같이 가입한 토론 동아리에서 만난 동기 유빈에게 관심이 가고

명석하지만 자기 주관이 뚜렸한 보나 선배를 보면서 묘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예전부터 친구였던 병서는 서먹해진 하림이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묘하게 준호를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학교 성적도 조금 애매한 결과를 받아든 준호의 고민은 커져간다.


누구나 인정하는 반듯한 모범생, 준호는 과연 잔잔한 듯 하지만 사실 수면 아래 미친듯이

소용돌이치는 학창 시절의 시간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을까?


내용은 이 정도 느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음... 생각보다 극적인 사건이나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전개가 이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고딩 1학년 일상을 담은 일기같은 느낌?


근데 사실 그 포인트에서 상당히 경외로운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일상물이 말이 쉽지

하나의 스토리를 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그냥 평범한 학교 다니고 친구들 만나는 이야기다. 요즘 넷플릭스에서는 덤덤한 수준까지 된

학교에서 마약을 판다던가, 아이들간에 치명적인 사각관계가 터진다던가,

누가 자살해서 그 과정을 추적하는 내용도 아닌... 그냥 평범한 모범생이 학교 다니는 이야기다.


성적 안나와서 스트레스 받고, 애들이랑 갈등하면서 짜증나고,

그러다 또 좋은 일이 있으면 풀어지고, 그게 계속되는 이야기다. 뭔가 스토리로 재미를 짜낼래야

짜낼 것도 없는 배경이다. 근데 놀라울 정도로 재밌다. 이게 경외롭다.


준호의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하루하루를 그 나이도 아닌 어른이 몰입해서 보면서

받는 문자 하나에 긴장하게 만들고, 빡친 상황에 같이 분노하게 만드는 매직이 이어진다. 와우...


작가님의 역량이 넘사벽이라는 것을 체리새우에 이어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어찌보면 지루할 정도의 일들에 긴장감과 의미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 이게 가장 좋은 작품의 스토리가 가져야 할 초심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라는 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엮여서 소통하고 반응하고 거기서 저마다의 행동으로 이어지며

그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스릴러물이던, 연애물이던, 정치물이던, 호러물이던, 결국 소재만 자극적이지 그 근간에는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근간에 깔려 있고, 사건만 좀더 자극적이거나 달라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충분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이 작품은, 오래된 장인이 최소한의 재료로만 맛을 낸 기본 맛집을 우연히 찾아 들어가

거기서 깊은 장인의 손맛을 제대로 맛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할 것이 많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사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시대의 교육에 대한 광기는 과연 그 끝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찌되었건 남들보다는 못하지 않게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에 부모는 아이를

내몰게 되고 그렇게 내몰린 교육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내적인 성숙함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성적에 의한

차별과 차등, 그리고 단순 목적 달성만 되면 그 외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먼저 배운다.


이 작품에서 병서와 하림이로 표현되는 빌런들의 존재를 통해서 그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뜨끔하지 않은 부모가 있을지 의문이다.


이제 점점 인구가 줄어가고, AI의 대체 영역이 커져가는 시대에 더 이상 사교육에 대한 광기는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칼럼 분석에 의하면, 학원 강사들이 요즘들어 방송에 나와서

강의가 아니라 예능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절벽에 놓인 사교육의 예고편이라고 하니깐.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후에 교육 시장이 붕괴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미리 화두로 던져야 할 것이다. 과연... 그걸 우리는 대비하고 있을까?


오직 점수내기에만 특화되서 작중에서도 정답자판기라는 멸칭으로 불려지고 키워진 아이들에게 우리는

네가 배운 것이 더는 의미가 없고, 이제 다른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과연 쉽게 말하고 본인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대답을 하기가 무서운 질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미래에 대해서 어른들의 획일성에 굴복하지 않는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기분좋은 느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기도 했고.


제목은 모범생의 생존법이지만, 오히려 나는 우리 아이들의 희망 일기라는 부제를 맘대로 붙여주고 싶은

이 흥미롭고 생각할 것이 많아지지만 희망찬 이야기에 찬사를 보내며 오늘의 리뷰를 마친다.





P.S 1 유빈이 너무 만렙 여고생인데? 근데 이러면 하림이가 너무 불쌍한 느낌이지 않나?

생각보다 입체적인 빌런을 만들지는 않는 작가님이지만, 이번 편에 빌런들은 너무 안습해서

조금은 동정이 간다는 생각도 들더라는 기분이...


P.S 2 체리새우와 명확히 달라진 점은 역시나 아이들의 로맨스가 나온다는 점일 것 같다.

그래서 뭔가 영상화했을 때 배우들의 이미지까지 상상하게 하는데, 작품의 내용이 너무 담백해서 과연

이게 드라마나 영화로 나올 수 있으려나? 아쉬움이 남는다. 이 아이들의 로맨스 은근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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