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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최후의 날

백제 최후의 날

by 차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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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의식 중에 특정한 트렌드에 확 꽂히는 일이 종종 있다.

내 경우에는 독서 트렌드에서 그런 일이 자주 생기는데, 이번에 갑자기 훅 들어온 소재는 바로 역사동화였다.


하지만 아무 작품이나 보는 건 좀 그렇고 기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딱 검증된 좋은 리스트가 있었다. 바로 비룡소 역사동화상 수상작들.


이 작품들이라면 역사동화가 흔히 보이는 과장이나 왜곡 등을 배제하고 순수한 의미의 역사 속을

살아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볼수 있지 싶어 선택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시리즈를 몇편 리뷰할 것 같은데 그 첫번째는 역시 1회 수상작 백제 최후의 날이다.


작품의 내용은 주인공 소년 석솔이 임존성 백제부흥군에서 몰려오는 적을 맞으며

예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원래 석솔은 웅진성 근처의 마을에 살던 소년. 여동생은 아파서 누워 있고,

아버지는 전쟁터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자결하듯이 독초를 먹고 숨진 아이다.


그런 의지할 곳 없는 세상에 석솔은 거칠게 어른들과도 맞서고, 나쁜 짓인줄은 알지만

다른 사람의 식량도 훔쳐서 험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전쟁으로 가진 곡식은 다 빼앗기고, 어린아이들이 먹고살 것은 없어서

항상 친하게 지내던 동무 도해와 같이 웅진성으로 향한다.


웅진성에서 구걸을 하다가 결국 곡식을 훔쳐 달아나던 석솔은 지나가던 의문의 사내 편밀에게 붙들리고

웅진의 성주인 예식에게 붙잡혀가 매를 맞고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먹을 것이 없는 석솔은 다시 웅진성에 가고, 이번에는 훔치는 대신에 일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한다. 그러다 다시 만난 편밀과 예식, 우여곡절 끝에 석솔은 성을 보수하는 일을 구하고

그러다 어찌저찌 편밀과도 친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진다. 웅진성이 폐쇄된 것이다.


의자왕이 사비에서 도망쳐 웅진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왕이 피난온 웅진을 당군이 포위한다.

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갇힌 석솔은 성에서 일하다 우연히 백제의 비화 공주가 낙상하는 것을 구하고

그 덕분에 공주와 연 왕자의 초대로 왕궁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된다.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주는 왕자와 공주에게 감동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궁에 있는 보물도 탐이 나는 석솔.

그래서 친구 도해와 같이 보물을 훔쳐 달아나기로 한다.


하지만 그때 마침 쳐들어온 당나라군의 기습에 석솔은 우연히 손에 넣은 갑옷을 입고 달아나다

백제 병사들에게 붙들리고 그 와중에 당나라군에게 살해당한 도해의 시신을 보게 된다.


붙잡힌 석솔에게 의자왕은 벌을 내리는 대신에 당나라 군대의 동향을 살피고 오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석솔은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는 도해의 복수를 하는 마음으로 정찰에 나선다.


과연 당나라 진지에서 석솔은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그리고 하루하루 피말리는 농성을 하던 의자왕과 연왕자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백제 최후의 날을 목격한 한 소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어보고 난 첫번째 감상은... 와우, 작가님 그 당시에 살다오셨어요?

동화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그 당시의 느낌에 어색하지 않은 느낌을 잘 그려내주셨다.


그리고 동시에 고대전쟁이기는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비정한 전쟁터의 처참한 풍경을

마치 종군기자의 카메라로 보는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상당히 참혹한 이야기다.

전쟁에 내몰린 아이들의 비극을 이보다 현실감있게 그린 작품도 드물 것이다.


거기에 단순한 전쟁의 비극을 넘어서, 시대에 비극인 기아와 궁핍으로 인해 가혹한

행동에 내몰리는 아이들의 불안정한 환경도 여과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참 놀라웠다. 마치 사극으로 연출된 전쟁 르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깐.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서 무거운 역사의 화두도 던져주고 있다.


천부로 주어진 권리를 가지고도 의무를 행하지 못한 왕에게 우리는 동정해야 할까? 단죄해야 할까?

충성의 의무에 던져진 백성들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면서 까지 그것을 관철해야 할까?


그저 거친 아이인 석솔의 시선과 망국의 무게를 짊어졌지만 마찬가지로 아이인 연의

대화와 우정 속에서 그 화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백제의 멸망이란 주제 앞에서 계백 장군과 황산벌의 결사대의

비장한 죽음 외에 그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거기 던져진 5천의 목숨은 그저 그렇게 숫자로 기록될 뿐인 의미없는 것이었을까?


잠시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보다보면 영화 황산벌을 떠오르게 한다.

마냥 코미디라고 생각되지만, 이 작품이 나에게 와닿은 것은 그 말미에 항상

비장하다며 칭송받는 가족을 죽인 계백의 행동을 무가치한 광기로 비난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렇다. 역사가 흥미롭지만 동시에 잔혹한 것은 그 안에 품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개인의 희생되는 삶의 이야기가 시신의 계단을 만들어 역사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런 비정하고도 광기어린, 인간이 만들어낸 행위 중에 가장 미친 행동에 휘말린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이후에도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쉽게 판단내리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역사는 가치를 가지니깐.

이 책을 읽으면서, 백제의 멸망에 거의 필수적인 귀결로 이어지던 계백의 처참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름없이 살아간 소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좀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깐.


어쩌면 우리는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로는 과거로 퇴행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 속에서 우리가 옳은 선택과 기로를 잡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것이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잠시 흥미롭게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어느 동화 속에 나온 석솔이란 소년의 시선에서 역사를 보기를.


그래서 잔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끌만큼이라도 나아져야 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우리가 그릇된 선택을 하거나 허영에 눈이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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