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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현 Mar 01. 2022

나 혼자 키우는 엄마는 꽃사장님

사연 있는 여자는 싫어요



사연 있는 여자는 싫어요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제 진짜 다 지나갔구나.' 하고 나는 안심을 한다. 감정과 표현에 있어 타고난 듯이 아주를 넘어 무척 솔직한 나라서, 좋으면 좋은 대로 아프고 힘들면 또 그런대로의 영향을 주변에 크게 끼치며 살아왔다. 솔직함이 내 장점이기도 하지만 나의 가장 큰 단점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문제점을 잘 알고 있어 힘들어질 것 같은 상황이 닥치면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20대에 이미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크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죽을 만큼 힘든 일이라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당장은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고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어떤 것도 남이 나 대신해줄 수 없고 반드시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30대가 된 후의 나는 혼자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여전히 솔직한 나라서 순간순간 울컥울컥 감정에 북받쳐 눈물부터 쏟아낼 때가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바로 표출하진 않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 감정의 요동이 조금 잦아들면 지극히 개인적인 계정에 일기처럼 끄적이는 정도로 끝을 낸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난 뒤 문득 그 일이 떠올랐는데 내가 평온할 때 '이제 정말 나아졌구나.' 싶어 지난 일기를 지운다. 그 후에야 그 일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스토리텔링,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좋지만 뭔가 사연 있는 여자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와서 싫다. 내가 생각해도 내 과거는 아픔이 주로 크게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승전 감사'로 살아가는 나라서 사연이 많다는 이유로 유명해지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사실 꾸준하게 방송 출연 제안을 많이 받았었다. 편찮으신 아빠, 이전하기 전 자리에서 겪었던 월세 문제(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서 질질 짜듯 내 눈물을 자극하는 그런 제의를 특히 많이 받았었다. 방송 제의 연락을 받으면 제일 먼저 묻는 질문으로 "어떤 취지로 촬영을 할 것 인가? 함께 출현하는 가게는 어디인가?"이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면 바로 거절. 내가 이어가고자 하는 소신과 방송 취지가 잘 맞는다면 오케이! 그리하여 촬영하게 된 최근 방송으로는 KBS1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 JTBC YouTube 이용진 x이진호'트러블러' 정도.



 누군가는 내가 그리고 '뽀빠이화원'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운이 좋게 유명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노력과 시간이라는 것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면 운이 따랐을 때 용기 있게 기회를 잡을 수 없다. 이건 그런 기회를 놓쳐도 보고 잡아도 본 진짜 내 경험에서 나오는 답이랄까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급작스럽게 악화된 아빠의 건강문제로 부모님께서 20년 넘게 (정확하게 따지자면 내 생일 1989년 5월 4일을 기점으로 시작해서) 지켜온 뽀빠이화원을, 24살이었던 내가 운영을 맡아하게 되었다.


매일의 출근룩(데일리룩)을 기록하며 그날 옷에 맞춰 미니꽃다발을 만들었다. SNS에 활발하게 활동하며 동네 꽃집이 아닌 '서촌에서 가장 오래된 뽀빠이화원'을 알리게 되었고, 나는 '미니쏭언니'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 인생의 1막이라고 여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사장이 되다 보니 정신적인 부담도 컸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젠트리피케이션, 월세 문제가 그렇다) 결국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 나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자연임신이 힘들고 매달 배가 아픈 날마다 응급실에 실려갈 만큼 일상이 버거운 자궁선근증이라는 병을 오랜 기간 앓으면서 점점 일과 연애가 어려워졌고 그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졌다.


 그런 상태에서 기대 없이 만난 사람과 (어리석게도 너무 쉽게) 결혼을 약속했고, 그러던 중에 나에겐 기적과도 같은 '임신'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야속하게 입덧과 소양증이 심해서 일을 아예 할 수가 없었고 안정기에 접어들어서도 조산 위험이 있어 누워만 지내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버티고 버텨 출산을 했지만 서울깍쟁이인 나와 부산 상남자인 그 사람은 극과 극으로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지독하도록 가부장적이셔서 당연스럽게 내가 독박 육아를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당연스럽게 산후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내 상태를 역시나 그 사람은 알아주지 않았고 그때 처음 이혼을 결심했지만 도저히 아이 없이 나 혼자서는 행복할 자신이 없어 돌아왔다. 그 후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결혼식을 치렀지만 나와 너무 다른 그 사람 곁에서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다 느껴져서 다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그 사람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정도는 맞는 구석이 있어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할 텐데..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르다면 하루라도 빨리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 여겨졌다. 헤어짐 말고는 답이 없다 느꼈으니까) 그렇게 나의 2막이 지나갔다.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항상 굴뚝같았지만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정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대략 어림잡아 상상하며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키울 수는 없겠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소하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랑이 넘치도록 키울 자신은 있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의사표현 잘하고 남 눈치 보지 않고 본인의 인생을 더 값지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아이 곁에서 한결같이 다정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강하게 있었다. 부모의 나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부족할지라도 아이와 함께 같이 성장하며 나아가는 올바른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말 그대로 아직까진 많이 서툴고 부족한 엄마지만 앞으로의 나는 분명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내 인생의 3막이 시작되었다.


내 곁에 언제나 함께해주는 우리 엄마, 올리브 김여사 님이 계시고 여전히 몸이 많이 편찮으시지만 든든하게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우리 아빠, 뽀빠이 송 회장님이 계시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그저 내 개인적인 사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정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부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 실력과는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드시 더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난 내 과거의 모든 일들은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절대 누굴 탓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득 후회를 할 수는 있지만 이미 잘 지나왔고, 그 일들을 통해 깨닫고 배우게 된 것들이 훨씬 많아서 이제는 오히려 감사함만 남는다. (역시 기승전 감사!)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핑계 삼아 나를 잘 봐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연민과 동정심 유발로 내가 하는 일들에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가끔 몇몇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혼자만의 착각으로 오해를 하더라. 내가 불쌍한 척 연기한다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성격상 솔직하게 지르면 질렀지, 거짓말을 어려워하는 관계로 불쌍한 척은 불가능하다에 가깝다.


 내 지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인정한다. 최근까지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낮아있던 상태여서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낳고 육아만 하다가 다시 일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당연한 거니까. 그래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들었던 결혼생활과 이혼 과정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나의 모습들을 잠시 잃었으니까. 그 모습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내가 직접 꽃시장에 갈 수가 없었다. 나 없이 절대 잠을 안 자는 아이였어서 더더욱 그리했고 봐 주질 않았으니까 어려웠다. 혼자가 된 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은 해야 하지만 욕심은 낼 수 없었다. 엄마 혼자 꽃시장에 보내야 해서 매주 마음이 어렵고 불편했다. 하지만 상황을 탓하게 되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아이가 어린이집에 잘 가주는 시간들에 감사하며 내가 더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나는 만큼 아이도 자란다는 것. 이제는 꽃사장님 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좋아하는 아이라서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저녁시간을 보내게 되더라도 이해를 해준다. 그래서 요즘은 직접 꽃을 보고 사 오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행복하다. 나는 이 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알바를 하거나 부업으로 다른 걸 겸한 적은 있지만 오히려 다른 일을 시작하는 두려움보다 이걸 그만둘 자신이 없다. 너무 사랑하는 일이니까.


 솔직히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도 아니다. 장사라는 게 보통 그러니까. 하지만 (그 어떤 사정들로 인해 그만둘 뻔했을지라도) 언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고, 아직까진 여전히 꽃사장님으로 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너무 좋다. 그렇기 때문에 사연 있는 여자는 싫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뽀빠이화원의 멋진 '엄마는 꽃사장님'으로 오래오래 꽃꽃하며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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