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2018.01.23

by 종이소리

여기에 어떤 '문'이 살았노라.

그리고 지금은 그 흔적이 사노라.

2018.01.23


[칼럼] 문이 살았던 자리, 흔적이 증명하는 존재의 무게


낡은 콘크리트 벽이 불러 세웠다. 그와 마주 보며 서서 찬찬히 살펴본다. ‘문’이 살았던 것일까?


지금은 거친 시멘트와 세월의 때로 메워져 버렸지만, 테두리를 따라 남은 불규칙한 굴곡들은, 이곳이 한때 누군가의 안과 밖을 연결하던 통로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문은 사라졌으나, 그 존재의 증거인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완고하게 살고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의 말대로라면, 눈앞의 이 벽은 단순히 막힌 벽이 아니라, 문이 존재했다는 뜨거운 증거이자, 그 문을 열고 지나갔을 수많은 발걸음과 손길이 남긴 시간의 다정한 기록물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결과물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끝났다고 믿지만, 사실 존재의 본질은 그것이 떠나고 남은 ‘흉터(痕)’와 ‘발자취(跡)’에 머문다.


‘흔적(痕跡)’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흔(痕)’은 몸에 남은 상처나 흉터를, ‘적(跡)’은 발자국을 뜻한다.


즉, 무언가 존재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딘가에 상처를 내거나 누군가의 앞길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이다. 상처 없는 존재란 없고, 흔적 없는 삶이란 무(無)에 가깝다.


사진 속의 막혀버린 문. 누군가는 이 문을 통해 고단한 하루를 마쳤을 것이고, 누군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 밖을 향해 나갔을 것이다.


문은 사라졌어도 그 문을 필요로 했던 삶의 동선은 벽 위에 굳은살처럼 박혀 있다. 문이 있던 자리가 주변보다 더 짙고 투박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그곳에 머물렀던 존재의 무게가 무거웠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네 삶도 이와 닮았다. 우리가 일터에서 쏟은 열정, 사랑했던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견뎌온 시간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증발하지 않는다. 내가 머물다 간 자리, 내가 만진 물건, 내가 건넨 문장들 속에 ‘흔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는다.


업사이클링 작가로서 마주하는 낡은 소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버려진 섬유와 가구 속에는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의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 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결국 '사라진 것들의 존재'를 다시금 증명해 내는 숭고한 작업이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는 어떤 흔적이 남고 있는가. 혹시 무언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존재 가치까지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잊지 말아야 한다. 문은 사라져도 그 문이 살았노라 말하는 흔적이 있는 한, 그 존재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흉터처럼 깊게 새겨진 그 자국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