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보다 지념(紙捻)

잃어버린 걸까, 무시한 것일까

by 종이소리

지념(紙捻),

잃어버린 이름이 증명하는

조선 공예의 자부심


​1940년 1월 6일 자 조선일보 기사 속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이름 하나가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바로 ‘지념(紙捻)’이다.

80여 년 전, 어쩌면 뉴욕의 한 상점가에서 “조선의 선물은 이것뿐이다”라는 극찬을 받으며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종이 노끈은, 안타깝게도 정작 주인이었던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져 버렸다.


잃어버린 것일까,

무시한 것일까

너무도 잘 짜는 우리 선조들의 일상이 만든 누구나, 아무나, 엮을 줄 아는 민예품, 지념


​1.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마주한 지념의 흔적

​기록의 실마리를 쫓아 국립민속박물관의 수장고를 뒤지다 보면, ‘지승’이라는 통칭 뒤에 숨어 있던 지념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지념반형(紙捻盤形):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이 기물은 음식을 저장하거나 운반하는 데 쓰였던 식기다. 얇은 종이를 비틀어 꼬아 그릇의 형상을 만들어낸 선조들의 정교한 솜씨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고맙게도, 지념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지념망(紙捻網):

농업 현장에서 수확한 물건을 덮을 때 사용했던 직사각형 형태의 망이다. 네 귀퉁이에 고리가 달린 이 실용적인 도구에는 ‘東(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소중히 쓰였음을 짐작게 한다.


​비록 이 유물들이 기사 속 ‘평양공예협동조합’의 생산품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종이를 비틀어 도구를 만들었던 지념의 역사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이미지출처 :구글

​2. 바다 너머에서 발견한

평양 송수당’의 자부심


​아이러니하게도 지념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는 일본의 웹사이트와 옥션 시장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낙랑칠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검은 옻칠 위에 붉은 주칠을 입힌 지념 작품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특히 일본에서 유통되는 ‘평양 송수당(松壽堂)’의 제품들은 명품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독보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1940년대 조선일보가 왜 그토록 지념을 “수출공예의 왕좌”라 극찬했는지,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옥션 사이트를 보며 확인해야 하는 현실이 망국시기의 통한만큼이나 아프고 부끄럽다.


​3. 지승보다 앞선 이름,

‘지념’이라는 확신


지념, 종이못;한지, 김수경2020

나는 감히 확신한다.

지념이 지승보다 먼저 시작된 이름이라고. 종이로 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 책장을 단단히 고정하기 위한 ‘종이 못’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념이기 때문이다.


지승(紙繩): 새끼를 꼬듯 두 가닥을 꼬아 만든 줄.

지념(紙捻): 종이 지(紙)와 비틀 념(捻)을 쓴 이름으로, 종이를 말아 감거나 비틀어 감은 형태.


고려시대 때 『제왕운기』를 묶는 데 지승이라는 이름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을지라도, 휴지(休紙)와 닥종이를 꼬아 활용했던 본질적인 행위는 지념이라는 이름 안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민예’의 가치를 설파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조차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 지념의 역사가 수많은 지승 관련 논문에서조차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음을 시사한다.


​4. 치료의 도구였던 종이 심지


​지념의 쓰임은 공예와 출판에만 머물지 않았다. 놀랍게도 의학의 영역에서 지념은 환자의 고름을 빼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선인류(藥線引流)’의 핵심 도구였다.


썩은 살을 걷어내고 새살을 돋게 하던 종이 심지, 그 자비로운 쓰임이야말로 지념이 가진 가장 고귀한 가치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니 우리는 소중한 전통문화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80년 전

서양인을 매료시켰던 그 정성의 온도는 여전히 사료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라진 이름 ‘지념’을 불러내는 일,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온 선물인 종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지념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 이 작은 종이 끈이 어떻게 환부를 치료한

인술(仁術)의 도구가 되었는지, 그 경이로운 의학적 발자취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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