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라 쓰고, 기다림의 지혜로 읽는다.

종이 그물, 그 단단한 기다림

by 종이소리

기다림을 즐기는 지혜의 이름, 종이


​1. 13년의 침묵, 종이의 지혜

​2013년, 뜨거운 열정으로 종이 노끈을 마루직기에 걸었다. 종이 노끈으로 바구니를 엮던 손이 직조에 도전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 대작 한 점이 뚝딱 나올 것 같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망연하게 그물을 짜고 한지 실을 올리던 손길이 멈춘 적이 있다.


당시엔 그저 '중단'이라 여겼던 그 작업물을 13년이 지난 오늘 다시 꺼내 본다. 빛바랜 듯하면서도 오히려 깊어진 황금빛을 띠는 종이 손지갑. 아마도 현물이면 아주 매끄럽게 잘 숙성되었을 결일 텐데.. 안타깝게 여러 번의 이사로 어디선가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꿈에서나 다시 만날까.. 겨자빛 손지갑. 이런 아쉬움과 함께 또 한 편으로는 뿌듯하다. 놀랍게도 그 무수한 계절을 나와 함께 견디며 더 단단해져 있는 종이 덕분이다.


들고 다닐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손바닥의 온기를 흡수하며 유연해지는 그 느낌. 그것은 종이가 단순히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호흡하며 함께 늙어가는 유기체여서 일 테다.


종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창작자의 마음이 제 곁에 도착할 때까지 고요히 자신을 삭이며 기다릴 뿐이다.


​2. 크라프트 그물,

지구의 인내를 닮은 성품.


​우리는 흔히 종이를 유약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크라프트 종이 노끈으로 짠 그물망은 그 어떤 인공 섬유보다 끈질기다.


그 단단한 그물망은 내게 있어, 모든 작업의 밑판이자, 지구의 미래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고민의 기초와 같다.


나무에서 온 종이가 다시 인간의 손을 거쳐 견고한 격자가 되는 과정은, 지구가 우리에게 허락한 자원을 가장 정중하게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이 그물의 역할은, 지구가 억겁의 세월 동안 생명을 품어온 인내와 닮아 있다.

거칠고 투박한 종이 노끈 한 줄 한 줄에는 땅의 기억과 태양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 2013년의 내가 짜놓은 그 견고한 기초가 있었기에, 2026년의 나는 비로소 그 위에 '지속 가능한 내일'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3. 지구가 보낸 편지: 종이가 품은 '기다림의 미학' 환경을 되돌아보라는 계시.


​종이는 나무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으로의 환생이다.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준 이 소중한 물질은 '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

너무 일찍 펼쳐지지도, 너무 늦게 스러지지도 않으며 작가의 의도와 자연의 섭리가 만나는 그 찰나를 기다린다.


​내가 13년 동안 작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은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종이가 품은 그 깊은 깊이를 이해할 만큼 나의 내면이 익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종이는 그 무수한 시절을 묵묵히 견디며 나에게 속삭인다. "모든 일은 시기가 도착해야 진행될 수 있다"라고. 지구에서 온 이 투박한 물질은, 조급함에 매몰된 현대인에게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행위'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4. 마중 나가는 보람, 종이로 빚는 지구의 내일


​그동안 종이가 견뎌온 시간은 헛된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질이 정신으로 승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발효의 시간'이었다.


업사이클링, 섬유공예 작가로서 내가 마주하는 종이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지구가 수천 년간 지켜온 생태적 순환의 가치를 "관심"이라는 시간에 다시 엮어 넣는 일이다.

한지에 공그르기 손바느질 . 2015.김수경

​[종이, 지구에서 온 내일]을 통해 내가 전하고 싶은 진심은 명확하다. 우리가 무심히 넘기는 종이 한 장에도 지구가 보낸 무거운 기다림이 담겨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다림에 응답할 때, 비로소 종이는 우리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인도하는 '내일의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5. 2026년, 다시, 실을 감으며


종이 그물. 그 투박한 격자무늬 위로 이제는 한지 실뿐만 아니라 리넨과 대마 실을 함께 올린다. 거칠면서도 정직한 식물성 섬유들이 종이 그물과 섞이며 내는 마찰음은, 마치 지구가 오랫동안 아껴왔던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놓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돌이켜보면 13년 전의 미완성은 단순한 중단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친환경과 업사이클링, 그리고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일상의 생존 언어가 된 '지금'을 위한 필연적인 멈춤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구가 겪어온 인고의 시간을 이 작은 작업물도 함께 견뎌온 셈이다. 그 세월 동안 종이는 낡아가는 대신 깊어졌고, 나는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멈춰 있던 시간 동안 응축된 에너지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되어 내 마음속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에게 더 빠르게, 더 많이 만들어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나는 이 종이 그물을 보며 다짐한다. 서두르지 말자고.


종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치 않고 나를 기다려준 만큼, 나 또한 종이가 내뿜는 고유한 속도에 내 호흡을 맞추며 숲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한 올 한 올 지구의 내일을 직조하는 이 행위는 이제 나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다. 13년 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가치를 고민하며 목소리를 보탠다.


그 연대의 목소리가 작업실의 온도를 데우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나아가야지. ​지구는 나에게 '종이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내라'는 긴 숙제를 보냈다. 이 숙제는 화려한 기술이나 빠른 성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자라고, 종이가 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환의 리듬을 존중하는 마음이어야만 가능하다.


​지구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일을 위해 천천히, 그러나 진정한 걸음으로 나아가야겠다. 종이 노끈과 한지, 리넨과 대마가 엮어내는 이 견고한 약속이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작은 방파제가 되어주길 소망하며.

​종이가 가르쳐준 기다림의 지혜로, 나는 오늘 다시 지구의 내일을 짠다. 우리 모두의 지구를 위해 천천히, 그러나 진정한 걸음의 울림을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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