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이야기

2023.11.19

by 종이소리

종이노, 노엮개, 조히노끈, 승뉴, 종이끈, 종이노끈, 노내끈, 나끈, 등등의 명칭으로 살아 온 우리 고유의 종이, 닥종이 노끈 '지승(紙繩)' 이야기.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지승'이라는 존재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생소하다는 표정으로 '그게 무엇이냐'라고 반문하곤 했다. 무리가 아니다. 지승으로 된 공예품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쓰일 일도, 마주칠 기회도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이소 같은 곳에서 천연 소재 바구니나 플라스틱(PP) 라탄, 혹은 최근 유행하는 종이라탄 제품을 손쉽게 접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곁에 존재해 온 '지승'이라는 이름은 그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 여전히 낯선 단어로 남아 있다.


나 역시 지승공예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 속에 깃든 가치를 발견했기에, 누구를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 소중함을 알리는 일이 나의 몫임을 직감할 뿐이다. 옛 선조들은 소임을 다해 버려지는 서책을 허투루 두지 않고, 이를 다시 꼬아 종이노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종이를 꼬아 만든 줄', 지승(紙繩)이다.


​종이를 새끼처럼 꼬아 끈을 만들고, 그 끈을 엮어 그릇을 빚으며, 박다위(짐을 짊어질 때 쓰는 끈) 같은 생활 도구로 변모시켰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놀랍고 경이롭다. 얇고 유약한 종이가 인간의 손길을 거쳐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 과정, 그 속에는 정성과 시대적 지혜가 고스란히 말려 들어가 있다.

소꿉 /한지, 크라프트지, 지승, 코일링/김수경2011

그러나 지승이라는 이름에 가려 아주 귀중한 역사적 명칭 하나가 우리말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라진 것일까, 지워진 것일까. 그 의문을 찾아 나선 길에서 나는 재밌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 선조들께서 꼬은 종이노끈은, 말과 글로 쉽게 풀이할 수 없는 정성과 시대적 지혜가 말아 올리고 감아놓은 선조들의 특별한 유산이란 것이다.


지념(紙捻), 시대를 엮고 미래를 잇는 종이 못의 기록


​2000년도부터 안산에 터를 잡고 섬유공예와 설치미술, 그리고 도시를 기록하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며 내가 천착해온 주제는 언제나 ‘순환’과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우리 종이 노끈, ‘지념(紙捻)’이 있다.


2016년이었다. 지승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옛 신문에 기록된 지승, 종이노끈을 검색하며 이틀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 속 사료들과 씨름하던 나는 드디어, 잊힌 우리 유산의 찬란한 흔적을 발견했다. 기사를 읽으면서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빨갛게 열이 올랐다. 그토록 찾았던 지승의 시작을 대충이라도 알게 된 것 같아서였다.


한지를 손끝으로 비틀고 꼬아내는 역동적인 행위와 그 정성이 응축된 단어, 지승. 그러나 지승보다 더 먼저 사용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지념이었다. ​​한지공예의 한 부분인 '지승(紙繩) 공예'는, 종이로 만든 끈을 통칭한다. 하지만 문헌과 현장을 넘나들며 찾아낸 더 귀중하고 본질적인 명칭은 어쩌면, ‘지념(紙捻)’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승이 먼저냐, 지념이 먼저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2016년, 지념에 대한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 있게 답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도 그 당시에는 지승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흉내도 내지 못할 작업이라는 생각에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시집가는 딸을 위해, 밤낮으로 종이를 꼬아서 요강을 만들고 옻칠을 해서 딸이 타고 갈 가마에 넣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더욱 지승에 대한 경외심이 커졌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내 손가락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뼈를 깎는 동작을 했을 것이며. 어떤 정성으로 그 살을 녹이는 작업을 했었을까. 그만큼 소재도, 돈도 모든 것이 귀한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아니고서야 달리 짐작할 방법이 없다.


흥분으로 익은 볼을 달랠 겸 차가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네이버에 지념을 검색하니 재밌는 자료를 찾아준다.


[약선인류 (藥線引流)]
달리 지념(紙捻)이라고도 부름. 외치법의 하나. 흡수가 잘되는 종이로 심지를 말아서 썩이는 약[백급즙(白及汁) · 칠보산(七寶散) 등]을 겉에 바르거나 속에 넣어 누공(瘻孔)이나 누관(瘻管) 안에 꽂아 넣어 고름과 썩은 살을 나오게 하여 창구(瘡口)를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이다./출처 한의학대사전



포배장 (包背裝)
책장의 인쇄 또는 서사된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접어 가지런히 중첩하고, 그 책장 단면의 가까운 부분을 뚫어 지념(紙捻) 또는 끈으로 먼저 철한 다음 한 장의 표지로 책의 앞면·등·뒷면을 덮어 싼 장정이다.



출판 장정인 포배장과 의학 기법인 약선인류를 통해 지념의 진가는 여실히 드러났다. 인쇄된 면을 뚫고 들어가 종이 뭉치를 단단히 고정하는 ‘종이 못’이 되어 수백 년의 지식을 보존하고, 인간의 환부를 치유하는 ‘종이 심지’가 되어 생명을 돌보았다니.


얇은 한지를 꼬아 만든 이 작은 끈이 수행해 온 역할은 실로 위대했다.

​종이 못이라니. 종이 심지라니..

이 경이로운 발견은 나를 또 다른 기록의 현장으로 안내했다. 80여 년 전, 이 종이 못이 바다를 건너 세계를 매료시켰다는 믿기 힘든 기록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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